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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워킹 리더들, 걷는 CEO가 경영도 잘한다?
탤런트
2007. 5. 25.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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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회장은 “너무 일찍 도착하는 것도 결례”라고 말하더니 갑자기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차가 선 곳은 인가는 물론 앉아서 쉴 곳조차 없는 국도 변이었다. 차에서 내린 라 회장은 기사를 향해 “잠시 쉬다가 오라”고 이르더니 이내 걷기 시작했다. 물론 비서도 따라나섰다. ‘잠시 바람을 쐬려고 그러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던 비서는 무려 1시간 가까이 라 회장과 함께 도보행진을 지속해야 했다.
라 회장은 시간만 주어지면 걷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CEO다. 약속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걷기 좋은 길을 발견하면 주저 없이 차에서 내려 걷는다. 특히 서울 외곽으로 나갔을 때는 걷기 좋은 길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쪽으로 길을 잡기도 한다.
“걷기 좋다, 차 세워 !”
라 회장은 특별한 운동을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표정은 언제나 밝고 혈색도 좋다. 도저히 칠십 나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정정하다. 라 회장을 만난 사람들이 공통으로 놀라는 대목은 다름 아닌 그의 걸음걸이다.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빠른 듯하다. 다부진 체구로 허리와 등을 꼿꼿이 펴고 30대 젊은이 못지않게 성큼성큼 걷는다. 확실히 그의 건강 비결은 ‘많이 걷는 것’이다. 그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시간상 밖에서 걷기가 여의치 않으면 러닝머신을 탄다. 하지만 결코 뛰는 법은 없다. 그래서 그의 러닝머신은 언제나 ‘워킹머신’이다. 시속 5~6㎞로 제법 빠르게 30분쯤 걷다가 속도를 시속 3㎞로 떨어뜨리고 5분쯤 더 걷는 것이 그만의 독특한 걷기다. “오히려 속도를 줄인 마지막 5분 동안 땀이 나면서 기분도 상쾌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빨리 걷다가 갑자기 정지하는 것보다 단계적으로 속도를 줄여 서서히 몸을 적응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라 회장은 국내 금융계의 거목이다. 신한은행 창립을 주도하고 ‘신한 웨이’로 불리는 서비스 혁신을 통해 지금의 신한금융그룹으로 키운 주역이다. 세 차례나 행장을 지냈고, 무려 16년째 CEO를 맡고 있다. 최근 10년 새 굿모닝증권·조흥은행·LG카드 인수 등 ‘해트트릭’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폭발적인 리더십 뒤에는 수십 년 간 몸에 밴 ‘걷기’가 한몫했을 것이라는 게 측근들의 얘기다. 걷기는 그의 건강을 유지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략을 짜고 전술을 구사하는 데 필요한 정신 활동에도 적잖은 기여를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가 빅딜을 앞두고 걷는 빈도가 높아졌다는 사실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라 회장이 걷기에 심취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의 검소함과 정직함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청탁도 용납하지 않는 그에게 가장 청렴한 운동은 아무 비용도 필요 없는 걷기였을 것이다.
‘경영자들의 운동’ 하면 오랫동안 골프가 주종목이었다. 물론 다른 종목에 심취한 경영자도 많다. 이건희 삼성 회장처럼 승마나 스키를 즐기는 경우도 있고, 최태원 SK 회장처럼 테니스 같은 보다 격렬한 운동을 추구하는 경영자도 있다.
국내에서 한때 마라톤 열풍이 불면서 CEO 사이에서도 풀코스 완주를 목표로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마라톤으로도 승부욕을 채울 수 없는 CEO 중에는 철인3종에 도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 건강은 물론 경영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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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빠르거나 격렬한, 혹은 특별한 종목들이 CEO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는 동안에도 소리없이 인기를 얻어온 종목이 바로 걷기다. 걷기에 매력을 느낀 CEO가 하나 둘 늘고 있다.
채광옥(63) 타타대우상용차 사장 역시 그런 CEO 가운데 한 사람이다. 대우자동차 부사장으로 있다가 대우상용차를 맡게 됐을 때만 해도 그는 ‘뛰는 것’이 ‘걷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인도의 타타자동차가 대우상용차를 인수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인도 본사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들의 경영스타일과 사고방식 등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채 사장은 “인도 최고의 타타그룹이지만 그들은 인수 후에도 한국 내 경영에 관해 좀처럼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재촉하지 않으면서 차근차근 여유롭게 상생의 경영스타일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채 사장은 그런 경영철학이 걸으며 수행하는 인도인들의 생활철학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평소 다소 의무적으로 하던 조깅 대신 걷기를 선택하게 된 계기다.
채 사장은 본사가 있는 군산에서 틈날 때마다 걷기에 나선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가 있는 군장(군산+장항)산업단지를 돌며 바닷바람을 쐰다. 업무시간에 제법 넓은 트럭 공장을 시찰할 때도 가급적 걸어서 살펴본다.
“한여름에는 땀에 옷이 젖는 것이 걱정돼 걷고 싶은 맘은 굴뚝같은데 그러지 못한다”고 아쉬워할 정도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월명산 주변으로 조성된 6㎞에 달하는 트랙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기도 한다.
주말에 집이 있는 분당으로 올라와서도 그의 걷기는 계속된다. 이틀 동안 걷기 좋은 탄천을 따라 2시간은 족히 거닌다.
박병무(46) 하나로텔레콤 사장은 본사가 있는 여의도를 무대로 걷기 운동을 생활화한 경영자다. 박 사장은 출근길에 강남에서 여의도로 진입하면 걸을 채비를 한다. 여의도공원에 도착하면 기사에게 “먼저 가라”하고 자신은 차에서 내려 공원을 가로질러 빠른 걸음으로 국회의사당 앞 회사까지 걸어간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살짝 땀이 나면서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박 사장의 얘기다.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공원의 흙을 밟으며 잠시 걷는 것만으로도 시작이 좋다. 걷는 동안 발걸음에 맞춰 ‘오늘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다 보면 그 짧은 시간에도 신기하리 만큼 정리가 된다고 한다. 이제 박 사장의 기사는 특별한 얘기가 없으면 출근길에 여의도공원 앞에 차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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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사장의 걷기는 점심 약속 때도 계속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여의도 CCMM빌딩 식당에 점심을 예약한다. 그리고 일찌감치 사무실을 나서 걸어서 약속 장소까지 간다. 보통 속도로 걸으면 20분, 제법 빨리 걸으면 10분 남짓 걸려 도착한다.
차로는 채 5분도 안 걸리는 길을 가려고 기사를 대기시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식전에 그렇게 잠깐이라도 걷는 것이 여러 가지로 이점이 많기 때문이다. 약간 배가 고프다 싶을 때 걸어주면 밥맛도 좋은 데다 먹고 나서 소화도 잘된다. 또 점심을 같이 하는 사람과 무언가 협상이나 의견조율이 필요한 자리라면 걷기 후 컨디션이 좋아진 덕분에 얘기도 잘 풀리게 마련이다.
박 사장은 걷기 위해서라도 현장에 자주 나간다. 특히 초고속망을 개통하는 현장에 들르면 차에서 내려 개통 기사들과 함께 걸으면서 점검한다. 전신주를 10여 개 이상 지나치다 보면 어느 새 1㎞는 족히 걸어온 셈이다.
개통 기사들과 얘기를 나누며 걸으면 현장의 문제점이나 근무자들의 애로 사항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한번은 비 오는 날 전신주를 올라야 하는 개통 기사들에 대한 걱정의 글을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올려 사내외에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걷기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강주영 SR개발 회장은 삼성동 코엑스 지하 아케이드를 걷기 장소로 삼고 있다. 그가 걷는 것은 점심을 먹고 나서다. 점심은 주로 사무실이 있는 도심공항센터빌딩 지하식당에서 임원들과 함께 한다.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 나면 결코 짧지 않은 강 회장의 지하 아케이드 워킹이 시작된다. 그는 수저를 놓으며 좌중에 “오늘도 차 한 잔 해야지” 하고 몸을 일으킨다. 물론 임원들 모두 따라나서야 한다.
차를 마실 곳은 지척에도 얼마든지 있다. 식당 바로 옆에도 찻집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바로 차를 마시는 법은 절대 없다. 목표는 1㎞는 족히 떨어져 있을 법한 패스트푸드점이다. 그곳에서 1000원짜리 커피를 판다. 돈 때문이 아니다. 건강 때문이다. 최단거리로 가는 것도 아니다. 일부러 둘러 둘러 가능한 한 동선을 길게 만들어 걷는 시간을 늘린다.
그는 걸으면서 가급적 말을 많이 하는 것이 특징이다. 걸으면서 자연스레 임원들과 회의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말을 하면서 걸으면 호흡조절이 쉽고 지루하거나 힘들다는 생각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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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개발은 5년 전 중국 선양(瀋陽)에 진출해 대단지 주상복합단지를 조성하면서 국내 건설사 중 중국 토착화에 성공한 첫 번째 기업으로 꼽힌다. 선양에서는 삼성이나 현대보다 SR개발이 더 유명할 정도다. 강 회장은 최근 미국에서도 대규모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도전적인 사업 추진력은 그의 진취적인 걸음걸이와 무관하지 않다.
현장경영을 많이 하는 경영자일수록 아무래도 많이 걷게 마련이다. 따라서 잘 걷는 경영자가 경영도 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격호 롯데 회장은 올해로 85세다. 고령이지만 놀라운 체력을 자랑한다. 가끔 백화점에 내려와 점장의 안내를 받으며 매장 곳곳을 순회하고 다닐 때면 수행원들이 여간 진땀을 빼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야단을 맞을까 전전긍긍해서가 아니라 워낙 걸음걸이가 빨라 길을 잡고 앞서가는 신 회장을 따라다니기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 순회는 심지어 1시간 넘게 지속될 때도 있을 정도다.
“도저히 팔순을 훌쩍 넘긴 노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정정하다”는 것이 측근들의 얘기다. 등이나 허리가 조금도 굽지 않은 데다 그 나이에 오는 흔한 관절염조차 없는 모양이다. 걷는 것이 평생 습관으로 몸에 배지 않고는 그렇게 걸을 수 없다는 게 측근들의 얘기다.
현장경영 하면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정 회장은 이른바 ‘GT5(글로벌 탑5)’를 목표로 품질을 최우선 과제로 국내는 물론 미국·유럽 공장까지 발걸음을 재촉해온 대표적인 경영자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경영스타일 탓에 정 회장이 파워 워킹을 추구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산책을 하며 천천히 걷는 데 더욱 심취한다는 것이 측근들의 얘기다.
그의 산책코스는 경기도 광주의 퇴촌 별장이다. 2000년 초 그는 이곳에 나무를 심고 조경을 다시 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실무자들은 언덕에 정 회장이 좋아하는 소나무도 많이 심고 꽃과 새를 키울 수 있는 온실도 만들었다.
완공되던 날, 실무진은 ‘정 회장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막상 결과를 본 정 회장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 회장을 감동시킨 것은 다름 아닌 혹시나 싶어 만들어놓은 산책길이었다. 정 회장은 그 후로 출장이 없는 주말이면 퇴촌으로 가 혼자서 몇 시간이고 산책을 하며 경영 구상을 하곤 한다.
경영자들이 걷는 취미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일단 걸을 만큼 시간을 내기가 어렵고 대부분 기사가 따라다니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도 차를 타게 마련이다. 하지만 걷는 데 과감한 투자를 하는 경영자들은 “무조건 빨리 간다고 경영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고 입을 모은다. 경영자에게 걷는 것은 어쩌면 또 하나의 자기 경영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