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언♡♡속담

명언 모음37

탤런트 2007. 7. 11. 17:54

* 미래는 현재에 의해서 얻어진다. - 새뮤얼 존슨(영국 시인,비평가:1709~1784)

*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낱 쓸모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할 줄도 알며 보고 들을 줄도 안다. 사물에 내재하고 있는 지식을 알면 알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해지게 된다. 모든 과일이 딸기처럼 한꺼번에 익어 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포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 파라켈수스

* 자신의 전체적인 인격을 발달시키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사랑을 위한 모든 시도가 결국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확신시켜 주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다. 즉 저마다의 개인적인 사랑을 통해 만족을 얻는 것도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이는, 그리고 진정한 겸손과 용기,신념과 철저한 훈련이 없이는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하고 싶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서문 中

*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즉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사랑받는' 문제로 보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 사랑에 대해서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태도의 배경에 깔려 있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것이고, 오히려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찾는 일이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 <사랑의 기술>

* 현대 문화의 특징적 성격- 우리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 상호간의 균등한 교환이라는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대인의 행복은 상점 진열장을 들여다보는 드릴과 현찰이든 할부이든 자기가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사 버리는 데 있다. - <사랑의 기술>

* 사랑에 빠졌다는 느낌은, 자신의 교환 가능성의 영역 안에 있는 인간 상품들과 관련지어서만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물건을 사러 나갔다고 하자. 상대는 사회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아 바람직해야 하며 동시에 상대가 나의 드러난 혹은 숨겨진 자산과 가능성을 고려하여 나를 쓸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두 사람이 자신들의 교환 가치의 한계에 대한 고려를 바탕으로 하여,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아냈다는 느낌을 갖게 될 때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 <사랑의 기술>

* 사랑에 대해서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세 번째 잘못은, 사랑에 '빠진다'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다'는 영속적인 상태, 좀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에 '머물러 있다'는 상태를 혼동하고 있는 데 있다. - <사랑의 기술>

* 그들은 심취, 즉 서로에게 '미쳐 있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 증거로 여기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전에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태도는, 그렇지 않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산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 되어 왔다. 사랑처럼 엄청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시작했다가 반드시 실패하고야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없을 것이다. - <사랑의 기술>

*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실패의 원인을 살펴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일이다. - <사랑의 기술>

* 인간 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인간이 동물 세계로부터, 본능적인 적응의 세계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을 결코 떠날 수 없고 비록 일부분일지라도 그 자연을 초월해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지만 일단 자연과 결별하게 되면 인간은 자연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즉 자연과의 원시적 합일 상태인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은, 아무리 돌아가려고 해도 불길이 훨훨 타오르는 칼을 가진 케루빔 천사(아홉 천사 중 제2위로, 지식을 맡은 천사)가 돌아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인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잃어버린 전인간적인 조화 대신에 자신의 이성을 발달시키고 새로운 조화, 인간적인 조화를 찾음으로써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이든 인류이든간에 인간은 일단 태어나게 되면, 본능처럼 철저하게 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추방된다. 확실한 것은 오직 과거에 대해서 뿐이고, 미래에 대해서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사실 뿐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자신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고독이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려는 욕구이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결정적으로' 실패한다는 것은 곧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완전한 고립에 대한 공포감은 분리감이 사라져 버리도록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그 외부 세계마저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 황홀경을 추구하는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그 강도가 매우 강렬하여 때로는 난폭하다는 것이며, 둘째로 전인격에 걸쳐서, 즉 몸과 마음 모두에서 일어난 다른 것이며, 세째는 일시적이며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 현대 서구 사회에서도 집단과의 일치는 분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아가 대부분 사라지고 또한 그 목적이 군중에 소속되어 있는 일치이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고 나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하는 감정이나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며 관습,의복,사상 등을 집단의 유형에 동조한다면 나는 구제된다. 즉 고독이라는 무시무시한 경험으로부터 구제되는 것이다. 독재적인 체제는 이러한 동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위협과 공포를 사용하며 민주주의 국가는 암시와 선전을 사용한다. - <사랑의 기술>

*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동조하기를 '강요받는' 정도보다 훨씬 더 동조하기를 '원하고' 있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동조하려는 욕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기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고 자기는 개인주의자이며,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의견에 도달했으며 어쩌다 우연히 자기 생각이 대다수의 생각과 같아졌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다른 사람과의 의견 일치라고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 옳다는 증거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약간의 개인성을 느끼고자 하는 욕구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한 욕구는 근소한 차이점에 의해 충족된다. - <사랑의 기술>

* 누구든지 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전세계를 구하는 것과 같고, 한 생명을 파괴하는 사람은 전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 <탈무드>

* 종교적인 맥락에서의 평등이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식이며 우리들은 모두 사람으로서 신성한 자질을 나누어 가졌으며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개인들간의 차이는 각기 존중받아야 하며 우리 모두가 하나이지만 우리들 개개인은 독특한 실체이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조화로운 우주라는 사실도 의미하고 있다. (중략)
 개성 발달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평등은 또한 서구 계몽주의 철학의 평등 개념의 의미이기도 했다. 칸트에 의해 매우 명확하게 설명된 그 평등 개념은 인간은 타인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그들이 목적인 한 동등하며 오직 목적으로서, 서로에게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계몽 철학의 사상을 따라, 다양한 학파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평등을 착취의 폐지, 즉 그 이용이 잔인한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간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이용을 폐지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평등의 의미는 계속 변화되어 왔다. 이 사회에서 말하는 평등이란 자동 인형의 평등, 즉 자신의 개성을 상실해 버린 사람들의 평등을 의미한다. 오늘날 평등은 '일체성'보다는 '동일성'을 의미한다. 즉 평등은 추상적인 동일성, 곧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오락을 즐기며 똑같은 신문을 읽고 똑같은 느낌, 똑같은 생각을 갖는 사람들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시대의 진보의 징표라고 찬양되어지는 몇 가지 업적들, 예를 들면 남녀 평등 같은 것들에 대해 약간의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 성숙한 사랑은 '개인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서의 일치'이다.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능동적인 힘이다. 즉 인간을 타인과 분리시키는 벽을 허물어 버리고 타인과 일치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고독감과 분리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며 동시에 각자에게 자기의 특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고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존재가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따로따로 남는다는 모순이 성립한다. - <사랑의 기술>

* 현대 사회는 개성화되지 않은 평등의 이상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대집단 속에서 자기의 기능을 원활하게, 아무런 마찰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그것도 그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 있다고 확신하며 모두 똑같은 명령에 복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서로 동일한 원자적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마치 현대의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상품의 표준화가 필요한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있고 이 표준화가 '평등'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 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아니 그래도 나는 이 고요한, 자는 얼굴을 잘 말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의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은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것 같고, 이 세상의 평화라는 평화는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듯싶게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스럽다.
- 방정환 <어린이 찬미>

* 교회에서 바쳐지는 연보는 단순히 교회운영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고 선교와 구제에 필요한 돈을 장만하는 수단으로서의 의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물질적 소유를 상대화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되어 있는 돈을 스스로 바친다는 것은, 돈이란 거룩한 세계에서는 상대적인 가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연보는 그 액수의 많고 적음보다는 연보로 바친다는 사실 자체에 많은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신앙이란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전혀 문제가 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도 받아야 하고, 서로 용기도 북돋아 주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에서 모범을 발견하기도 한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모르면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신앙생활에서도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의 결점을 통하여 자신의 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눈에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감독을 받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람의 감독을 받는 것이 훨씬 더 힘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정신력이 약하여 아주 쉽사리 무책임해지거나 나태해지는데, 이때마다 우리 주위에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로부터 감시도 받고 충고도 들으며 격려를 받고 그들의 좋은 본을 따르는 것은 매우 유익하고 어떤 의미에서 불가결하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절대적인 것은 절대로 없다. - 제임스

* 그렇다. 만약 사자나 소가 손이 있어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인간처럼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말은 말처럼 생긴 신들을 그릴 것이고 소는 소같이 생긴 신들을 그릴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와 비슷한 형상의 신을 만들어 낸다. 이디오피아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을 새까맣고 코가 납작한 것으로 생각하고, 트라키아 사람들은 그들의 신에게 빨간 머리와 파란 눈을 제공한다. - 제노파네스

* 사람에 의하여 증명되고 논해지는 신이란 인간이 가진 한계성을 초월할 수 없고, 따라서 사람이 만든 신이 될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하(L.Feuerbach)가 신학은 사실상 인간학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란 사실 인간 자신의 이상형적 투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여 현대 무신론의 아버지가 되었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포이에르바하의 정신적 제자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왜 사람들이 신이란 것을 투영하게 되었는가를 경제적 바탕 위에서 그럴 듯하게 설명하였다.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착취하는데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다음 세상에서 모든 것을 정당하게 심판한다는 신을 하나 만들어 두는 것이 매우 편리하다는 것이다. 땅위에서의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모든 것을 감찰하고 모든 것을 정의롭게 심판하는 신이 있으면, 그것은 그들에게 무한한 위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은 그런 속임수로 못 가진 자들을 무마시키는 대신 땅위에서의 온갖 경제적 수탈을 마음대로 감행한다는 것이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현대인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반면, 인간에 의하여 이해되고 납득되는 신은 참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셔야 할 필요가 있고,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심지어 그런 하나님을 믿고 싶기까지 한데도 불구하고 그런 요청에 의하여 제시되는 하나님은 사람에 의하여 투영된 하나님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현대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의하여 투영되지 않은 하나님은 거의 확실하게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현대인이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커다란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이론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론이고, 인간의 모든 이론은 인간이 가진 모든 한계성과 약점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증명되고 설명되는 신은 참 하나님이라기보다 사람이 만들어 낸 신일 가능성이 많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는 전제되어 있는 것이지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신약 성경 로마서 1장 17절~27절에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문제삼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문제로 삼는다. 이것을 한번 음미해 보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문제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빛을 비춰 줄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하는 문제는 그 자체로는 해결할 수 없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성경의 일반적인 입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 엄연히 계시는 하나님을 왜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느냐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우선 모든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비록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는 보이지 않는 것이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통하여 그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정직한 마음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신학자 칼빈은 '신에 대한 느낌'이라고 하고,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이 느낌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종교의 씨앗'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의 "아무리 미개한 나라라도, 아무리 야만민족이라도 그들 마음속 깊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한두 사람을 항상 속일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을 한두 번 속일 수는 있을지 모르나 수많은 사람을 항상 속일 수는 없다. - 링컨

* 믿음없이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지만 성경없이 믿음이 생기기도 어렵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유명한 불란서 천문학자 라플라스(Pierre Laplace)는 성좌도(星座圖)를 그려 나폴레옹에게 보여주었다 한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본 나폴레옹은 하늘의 그림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하나님이 계신 자리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고 불평을 했다. 그때, 라플라스는 자신있게 "폐하, 그따위 가정은 저에겐 필요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그렇다. 그것이 현대인이다. 하나님같은 가정이 없어도 모든 것도 설명되고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현대인의 일반적인 확신이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철학을 조롱하는 것이 진정 철학하는 것이다. - 파스칼

* 행복이란 어제보다는 오늘이, 조금 전보다는 지금이 더 좋아져서 행복하다고 느끼지, 이전의 좋은 상태가 그대로 반복되면 벌써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게 되고, 조금 못해지면 곧 불행해지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므로 행복이 항상 계속될 수는 없고, 한 사회가 항상 낙관주의적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쇼펜하우어가 지적한 대로 인간은 항상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에 오는 불만과 그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에 엄습해 오는 권태 사이에 시계 추처럼 왔다갔다한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텔레비전 방영으로 미국을 비롯해서 전세계에 큰 충격을 준 '그 다음 날(The Day After)'이란 프로그램에서 그리고 있는 핵무기 사고는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다. "가능한 것은 현실화된다."(If anything can, it will.)는 법칙이 있다. 통신상의 문제나 오해, 인간의 판단 잘못은 언제나 가능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핵무기의 선제 공격은 논리적으로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미국의 사학자 화이트는 오늘의 환경오염 문제는 현대 자연 과학을 가능케 한 기독교적 자연관 때문에 생긴 것이요, 따라서 기독교가 상당할 정도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책임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 절제와 사랑은 무시하고 과학기술을 다만 자연의 정복과 그로 말미암아 얻게 된 무시무시한 힘을 즐기기에 급급해온 현대 과학문화가 그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현대인의 소외현상, 대중화 현상은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야기한다. 개인은 거대한 조직의 한 미미한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불가피하게 전체에 대한 개인의 책임의식을 약화시키고, 전체에 대한 조감이 불가능하게 되고 너무나 복잡한 사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확실하지 않음에 따라 임기응변의 사고방식과 향락 위주의 행동방식이 생겨난다. 이리하여 사회의 거의 모든 규범은 법률로 표현되어 강제로 지켜지도록 되어 있어 이것 또한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결정과 행동반경을 제한하고 있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먹는 것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15:11,18,20)하셨다. 악이란 사회에서 시작되어 개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만들어져 사회로 쏟아져 나온다고 본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악의 생산공장인 것이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웃을 때는 17개 근육, 화낼 때는 43개의 근육이 움직인다.

* 내성(內性)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나"는 발견되지 않고 이제까지 자기가 경험한 것들만 나타난다. - 흄

*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아도 의식의 옹달샘 속에 들어 있는 "나"란 조약돌은 찾을 수 없다. - 싸르트르

*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 아니라 철학의 궁극적 목적이라 한 것도 다른 모든 것을 어느 정도 알아야 자신을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하나님의 사랑의 조명 아래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부끄러운 자신을 발견한다. 그와 사랑의 관계에 들어갈 만한 자격이 없음을 발견한다. 키엘케골이 비유했듯이 하녀가 왕자의 사랑을 받아 감격하나, 동시에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며 보잘것없는가를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마치 거짓말한 학생이 선생님의 부릅뜬 눈을 피하듯,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눈은 자꾸 밑으로만 내려가며 그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참 모습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가 되었다고 감사의 찬양을 부르던 바울은 그의 사랑의 광채 앞에 섰을 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하고 탄식하였다. 그의 사랑으로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로 격상된 것에 대한 감사와 동시에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할 자격이 없음을 깨달음으로 오는 부끄러움의 교차, 이것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속에 들어갔을 때 나타나는 "나"의 모습이다.
 그 부끄러움은 분명히 절망으로 이끄는 부끄러움이 아니다. 쥐구멍 속으로 완전히 숨어버리고 싶은 그런 부끄러움은 아니다. 부끄럽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고맙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부끄러움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자신을 숨기지 않고 폭로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것이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개인의 악도 사회에는 유익할 수 있다. (Private vices, public benefits)
  - 만더빌(네덜란드의 의사)

* 그때 돈을 빌려간 '나'와 지금의 '나'가 동일한 '나'란 것을 증명해 보시오.
  - 희랍의 궤변론자

* 삶이란 죽기 위하여 생겨난 하나의 선물일 뿐, 삶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점이란 그것이 다행히도 길지 않다는 것이다. - 세네카

* 인생이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투쟁과 그것이 만족되었을 때 엄습해 오는 권태 사이에 마치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할 뿐이다. - 쇼펜하우어

* 내일 아침에 내가 아침 식사를 거르지 않아도 되리라는 기대는 빵굽는 사람의 자비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이기욕 때문이다. - 스미드(19세기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 에로스: 수동적인 사랑. "...때문에(because of)" 사랑하는 것. 명령할 수 없는 사랑.
          가령, 조국애,이성과의 사랑,스승에 대한 존경...
  아가페: 능동적인 사랑. "...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사랑하는 것.
          가령,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대표적.
 
* 에로스에서는 욕망이 사랑의 원인이라면, 아가페에서는 사랑이 욕망의 원인이다.

* 한국 사람은 명예를 중요시하여 돈을 들여서라도 명예를 사려 하고, 서양 사람은 명예보다는 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돈 안 생기는 명예에는 관심이 없다.
-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 찬미자들은 예술가들이 다락방에서 사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만, 예술가들이 스스로 선택해서 다락방에 산 적은 없다. (They have never lived from choice in the garrets in which their admirers like to see them.) - 서머셋 모옴 <서밍 업(The Summing Up)>

* 세상에는 자기 자신의 선한 행동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대신 자신의 악한 행동에 대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흔히 자기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결점을 벌충할 수 있는 자기의 장점들을 삭제해 버리기 때문에, 단지 약하고, 절조가 없고, 악한 사람으로만 보이게 된다.
(There is a sort of man who pays no attention to his good actions, but is tormented by his bad ones. This is the type that most often writes about himself. He leaves out his redeeming qualities, and so appears only weak, unprincipled, and vicious.)
- 서머셋 모옴 <서밍 업(The Summing Up)>

* 나는 미스 코리아라든지 미스 유니버스 따위를 아름다움으로 신용할 수 없어. 그들에게는 잡지의 표지나 사진관 앞에 걸린 그림처럼 혼이 없기 때문이야. 아름다움을 정치처럼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보다는 모독하고 있는 거야. 아름다움이란 겉치레가 아니기 때문이지. 상품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야. - 法頂 <無所有> '아름다움' 중에서

* 언젠가 버스 종점에서 여차장들끼리 주고받는 욕지거리로 시작되는 말을 듣고 하도 불쾌해서 그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고물차에서 풍기는 휘발유 냄새는 골치만 아프면 그만이지만, 욕지거리는 듣는 마음속까지 상하게 하니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시궁창에서 썩고 있는 추악한 악취야. 그러한 분위기 속에 잠시라도 나를 빠지게 할 수가 없었어. - 법정 <무소유> '아름다움' 중에서

* 그러니까 아무개를 안다고 할 때 우리는 그의 나타난 일부밖에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데서 우리는 불쑥 그와 마주칠 때가 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이 때로는 우리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듯이.
- 법정 <무소유> '相面' 중에서

*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 내 소유란 있을 수 없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물건이 아닌 바에야 내 것이란 없다.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가버리는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나의 실체(實體)도 없는데 그 밖에 내 소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한동안 내가 맡아 있을 뿐이다. - 법정 <무소유> '本來無一物' 중에서

*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 한낮의 기온에는 아랑곳없이 초가을의 입김이 서서히 번지고 있는 근일(近日). 이른 아침 우물가에 가면 성급한 낙엽들이 흥건히 누워 있다. 가지 끝에 서성거린 안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져버린 것인가. 밤 숲을 스쳐가는 소나기 소리를 잠결에서 자주 듣는다. 여름날에 못다 한 열정을 쏟는 모양이다. 비에 씻긴 하늘이 저렇듯 높아버렸다. 이제는 두껍고 칙칙하기만 하던 여름철 구름이 아니다. - 법정 <무소유> '復元 佛國寺' 中

* 죽음은 인간이 생을 누렸기 때문에 생기는 의무, 그 인간 개인에 대한 의무, 同世代人 특히 보다 젊은 同世代人에 대한 의무에 시간적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 토인비

*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매 바람이 지나가던 대가 소리를 지니지 않고 기러기가 차운 못을 지나매 기러기 가고난 다음에 못이 그림자를 머물게 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君子는 일이 지나고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나니라. - <채근담> 自然篇

* 山林에 숨어 삶을 즐겁다 하지 말라. 그 말이 아직도 山林의 참 맛을 못 깨달은 표적이라. 名利의 이야기를 듣기 싫다 하지 말라. 그 마음이 아직도 名利의 미련을 못 다 잊은 까닭이라. - <채근담> 自然篇

* 꾀꼬리 울고 꽃이 우거져 山과 골이 아름다워도 이 모두다 乾坤 한 때의 幻境! 물 마르고 나무잎 떨어져 바위 돌 벼랑이 앙상하게 드러남이여 이 곧 天地의 참 모습이로다.
- <채근담> 自然篇

* 세월은 본디 길고 오래건만 마음 바쁜 이가 스스로 짧다 하느니. 天地는 본디 넓고 넓건만 마음 속된 이가 스스로 좁다 하느니. 아, 風花 雪月은 본디 한가롭건만 악착한 사람이 스스로 번거롭다 하느니. - <채근담> 自然篇

* 風情을 얻는 것은 많음에 있지 않다. 좁은 못, 작은 돌 하나에도 煙霞(연하-안개와 노을)가 깃든다. 훌륭한 경치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오막살이 초가에도 시원한 바람, 밝은 달이 있다. - <채근담> 自然篇

* 고요한 밤 종소리를 듣고 꿈 속의 꿈을 불러 깨우며 맑은 못의 달 그림자를 보고 몸 밖의 몸을 엿보는도다. (解義:인생이 꿈 같은데 꿈 속에도 꿈이 있다. 깊은 밤 종소리를 듣거든 그 꿈을 깨워 마음의 창을 열라. 덧없는 이 몸 안에 우주의 본체가 있다. 맑은 못에 잠긴 달빛을 보거든 그 우주의 모습을 엿보라. 깨달아야 꿈인 줄 알 것이요 보아야 참인 줄 알 것이다.)
- <채근담> 自然篇

* 나에게 한권의 經이 있나니 종이와 먹으로 이룬 것이 아니로다. 활짝 펴 놓아도 글자 한자 없건마는 항상 큰 광명이 예서 퍼져 나가노라. - <禪家>

* 사람들은 모두다 글자 있는 책만 읽고 글자 없는 책은 읽지 못하며 줄 있는 거문고는 탈 줄 알아도 줄 없는 거문고는 탈 줄 모른다. 형체있는 것만 쓸 줄 알고 그 정신을 쓸 줄 모르나니 무엇으로 琴書의 참맛을 얻으랴. - <채근담> 自然篇

* 마음에 物欲이 없으면 이 곧 가을 하늘 잔잔한 바다! 옆에 琴書 있으면 이 곧 神仙의 집!
  - <채근담> 自然篇

* 손과 벗들이 구름 같이 몰려와 기껏 마시고 질탕히 노는 것은 즐거운 일이로되 얼마 안되어 時間이 다하고 촛불이 가물거리며 香爐(향로)의 연기는 사라지고 차(茶)도 식고 나면 즐거움이 도리어 흐느낌을 자아내어 사람을 적막하게 한다. 아! 천하의 일이 모두 이 같을진저! 어찌 빨리 머리를 돌리지 않느뇨. - <채근담> 自然篇

* 참다운 黃金時代는 그 黃金時代가 오기 직전에 있다.

* 事物 속에 깃들어 있는 참 취미를 깨달으면 五湖의 풍경도 마음 속에 들어오고, 눈 앞에 있는 하늘 기틀을 잡으면 千古의 영웅도 손아귀에 들어온다. (解義:事物 속에 깃들어 있는 정취를 체득하면 五湖의 풍경도 마음 속에 들어올 것이니 구태여 가서 봐야할 까닭이 없다.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흥망성쇠와 離合消長(이합소장)이 있나니 그 機微(기미)를 간파하면 千古의 영웅도 손아귀에 넣어서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다. 앉아서 만리를 보고 누워서 천고를 헤아리는 마음이 바로 이것이다.) - <채근담> 自然篇

* 山河의 큰 덩어리도 이미 微塵에 속하거늘 하물며 티끌 속의 티끌이랴. 血肉의 몸뚱아리도 물거품과 그림자로 돌아가거늘 하물며 그림자 밖의 그림자랴. 아주 밝은 지혜 아니면 다 벗어 던지는 마음 없도다. (解義:廣大無邊(광대무변)한 우주로 보면 지구도 한 티끌이다. 그 속에 사는 사람이야 티끌 속의 티끌이 아니랴. 피가 통하고 살이 붙은 이 몸뚱아리도 또한 물거품과 그림자로 돌아간다. 하물며 명예나 財利(재리)같은 것이야 그림자 밖의 그림자가 아니랴. 이와같은 도리를 뚫어보는 지혜 아니면 모든 것을 了脫하지 못하리라.)
- <채근담> 自然篇

* 石火같이 빠른 빛 속에 길고 짧음을 다툼이여, 이긴들 얼마나 되는 光陰이뇨. 달팽이 뿔 위에서 자웅을 겨룸이여, 이겨 본들 얼마나 되는 世界뇨. - <채근담> 自然篇

* 부귀(富貴)를 뜬 구름인양 하는 기풍(氣風) 있어도 반드시 깊은 산골에 살지 않노니. 山水 좋아하는 버릇이 고질(痼疾)됨은 없어도 항상 스스로 술에 취하고 시를 탐하느니.
- <채근담> 自然篇

* 명리(名利)의 다툼일랑 남들에게 다 맡겨라. 뭇 사람이 다 취해도 미워하지 않으리라. 고요하고 담박(淡泊)함을 내가 즐기나니 세상이 다 취한데 나홀로 깨 있음을 자랑도 않으리라. 이는 부처가 이르는 바 "法에도 안 매이고 空에도 안 매임"이니 몸과 마음이 둘다 自在함이라. - <채근담> 自然篇

* 길고 짧은 것은 일념(一念)에 말미암고 넓고 좁은 것은 촌심(寸心)에 매였도다. 마음이 한가로운 이는 하루가 千古보다 아득하고 뜻이 넓은 이는 좁은 방도 天地같이 너그러우리라.
- <채근담> 自然篇

* 물욕(物欲)을 덜고 덜어 꽃 가꾸고 대(竹)를 심어 이 몸 이대로가 무위(無爲)로 돌아간다. 시비(是非)를 잊고 잊어 향 사르고 차를 끓여 모두다 내 몰라라. 무아(無我)의 경(境) 예로구나. - <채근담> 自然篇

* 인생은 영원한 전장이다. 거기에서는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가 싸우고 있다. 이 전장에서는 늘 새로운 법칙이 낡은 법칙을 대신한다. - 로맹 롤랑(프랑스 소설가:1866~1944)

* 내세를 소홀히 여기는 자는 현세에 죄를 짓는다. - 에드워드 영(영국 시인:1683~1765)

* 움직임을 좋아하는 이는 구름 속 번개 같고 바람 앞에 등불 같다. 고요함을 즐기는 이는 차가운 재 같고 마른 나무 같다. 모름지기 멈춘 구름 속에 소리개 날고 잔잔한 물 위에 고기 뛰는 기상이 있어야 바야흐로 悟道의 마음을 지니리라. - <채근담> 自然篇

* 소나무 우거진 시냇가에 지팡이 짚고 홀로 간다. 서는 곳마다 구름은 찢어진 누비옷에 일어나느니. 대숲 우거진 창가에 책을 베개삼아 편히 눕는다. 깨고 보니 달빛이 낡은 담요를 비추누나. - <채근담> 自然篇

* 외로운 구름이 산골에서 피어남이여. 가고 머무는 것이 하나도 거리낌이 없구나. 밝은 달이 하늘에 걸림이여. 고요하고 시끄러움을 둘다 상관치 않누나. - <채근담> 自然篇

* 물은 흘러도 소리가 없나니 시끄러운 곳에서 정적(靜寂)을 보는 취미를 얻을 것이요, 산은 높건만 구름이 거리끼지 않나니 有에서 나와 無로 들어가는 기틀을 깨달으리라.
- <채근담> 自然篇

* 갈대꽃 이불 덮고 오막집에 살아 눈에 누우며 구름에 잠 잘지라도 밤 기운을 족히 막을 수 있도다. 댓잎 술잔 속에 바람을 읊조리고 달을 희롱하면 만장(萬丈)의 홍진(紅塵)을 멀리 떠나리라. - <채근담> 自然篇

* 대나무 울타리 밑에 홀연히 개 짖고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면 황홀하여 구름 속 세계에 있는 것 같다. 書窓안에 매미 노래하고 까마귀 우짖는 소리를 들으면 바야흐로 고요 속의 乾坤을 안다. - <채근담> 自然篇

* 봄날은 기상(氣象)이 번화(繁華)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심신(心神)을 무르익게 하되 가을날의 흰 구름 가벼운 바람을 어이 당하랴. 난초는 꽃답고 계수는 향기로운데 물과 하늘이 한 빛이라. 天地가 맑고 밝아 사람의 마음뿐 아니라 뼈 속까지 청정(淸淨)히 하는 가을만 하랴. - <채근담> 自然篇

* 俗人은 봄을 즐기지만 哲人은 가을을 즐긴다.

* 몸은 매이지 않는 배와 같이 흐름에 맡겨두라. 가고 멈추는 것은 바람이 알리로다. 마음은 이미 재된 나무와 같은지라. 칼로 쪼개거나 香 발라 꾸미거나 무슨 상관있으랴.
- <채근담> 自然篇

* 발(簾) 걷고 난간에 기대어라. 푸른 산이 구름을 토하고 맑은 물이 안개 머금음을 보면 乾坤이 본디 자재(自在)함을 알리니. 대숲 우거진 골에 제비 새끼 치고 비둘기 울음 울어 세월을 맞고 보냄이여 物我를 둘 다 잊을 줄 아노니. - <채근담> 自然篇

* 옛 고승이 이르기를 "대 그림자가 축대 위를 쓸어도 티끌은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못을 뚫어도 물에는 자취가 없다"하고, 옛 선비 말하기를 "흐르는 물은 아무리 빨라도 둘레는 고요하고 꽃은 자주 지지만 마음은 스스로 한가롭다" 하였다. 사람이 항상 이 뜻을 가지고 사물에 접하면 몸과 마음이 얼마나 自在하랴. - <채근담> 自然篇

* 숲 사이 솔거문고 소리, 돌 위의 샘물 소리, 고요히 들으면 이 모두 다 天地自然의 풍류(風流)임을 안다. 풀섶의 안개 빛, 물 속의 구름 그림자, 한가로이 보면 乾坤 최상의 文章임을 안다. - <채근담> 自然篇

* 사나운 짐승은 길들이기 쉬워도 사람의 마음은 항복받기 어렵고, 깊은 골짝은 채우기 쉬워도 사람의 마음은 채우기 어렵다.

* 고기는 물을 얻어 헤엄치건만 물을 잊는다. 새는 바람을 타고 날건만 바람있음을 모른다. 이를 알면 가히 사물의 거리낌을 초월할 것이요 천연(天然)의 묘기(妙機)를 즐기리라.
- <채근담> 自然篇

* 지극한 은혜는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있고 진실한 즐거움은 괴로움과 기쁨을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 있다.

*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 잠언 3:15

* 새로 등극한 임금이 어진 선비를 찾지 않는다면 그 나라를 잃을 것이며, 현인을 발견하고도 빨리 등용하지 않는다면 현인측에서도 그 임금에 대해 열성을 내지 않을 것이다.
무릇 현인 아니고는 긴급한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어진 선비 아니고는 함께 국사(國事)를 도모할 수 없는 것이니, 현인 찾기를 완만히 하고 어진 선비를 외면한 채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던 예는 일찌기 없었다. - <묵자(墨子)>

* 봄은 졸린 시절이다. 고양이는 쥐잡는 것을 잊고, 사람은 갚을 빚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때론 자기 넋이 어디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제정신을 못차린다. 다만 유채꽃을 멀리 바라보았을 때에 잠이 깬다. 종달새 소리를 들었을 때에 넋이 어디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종달새가 우는 것은 입으로 우는 게 아니라, 넋 전체가 우는 것이다. 넋의 활동이 소리로 나타난 것 중 저만큼 기운찬 것은 없다. -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

* 죽을 때까지 청년의 정신을 지녀라. - 토인비

* 여우는 무너진 축대(築臺)에서 잠을 자고 토끼는 황폐한 전각(殿閣)에 달음질치니. 아! 이는 당년(當年)에 가무(歌舞)하던 터전이로다. 이슬은 황국(黃菊)에 싸늘하고 연기는 마른 풀에 감도나니 이 모두 다 그 옛날 전쟁하던 땅이로다. - <채근담> 自然篇

* 한가히 뜰 앞에 꽃이 피고 짐을 보노라. 가고 머무름에 뜻이 없거니 부질없이 하늘 밖에 구름이 뭉치고 흩어짐을 보노라. 하늘 맑고 달 밝은데 어딘들 날지 못하리오만 부나비는 홀로 촛불에 몸을 던지나니. 맑은 샘, 푸른 줄기 있거니 무엇인들 먹지 못하랴만 올빼미는 썩은 쥐를 즐기나니. 슬프다! 세상에 부나비와 올빼미 되지 않는 이 몇 사람이뇨.
- <채근담> 自然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