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이란 본래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또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지, 그저 생겨났으니 살 때까지는
죽지 못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달픈 삶에 쫓겨 이런 문제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각박한 현실생활이 아닐까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잘 사는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농사짓는 사람이나
장사하는 사람이나 고기 잡는 사람이나 정치인, 학자, 심지어는 부처님, 공자,
예수에게 물어보더라도 잘 살려는 마음,
이 한 생각만은 똑같이 갖고 있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 사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세계의 경제를 한 손에 넣고
주무르는 재벌이 되는 것이나,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이 되거나, 또 사자후의 웅변을 토해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서늘하게 만들고, 천하의 독자를 붓 하나로 놀라게 하는 문호가 된다면 잘 사는 것일까요.
아니면 부귀와 명예를 헌신짝처럼 던져 버리고
떠도는 구름처럼 사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일까요.
모두 아닙니다. 겉치레의 잘 사는 사람일지 몰라도, 참된 의미에서 말하는 잘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잘 사는 것은 곧 부족함이 없는 것이고, 구할 것이 없는 삶입니다. 원망이 없고, 성냄이 없고, 미움과 질투가 없는 것
또한 잘 사는 것입니다.
공포와 불안이 없고,
강제와 속박도 없고, 해탈과 자유가 있는 삶,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보다 위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늘 마음이 흡족하다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말은 아무 내용이 없는 말입니다.
인간이 100년간 살 권리를 갖고 와서
하루 살았다는 말은 하루 죽었다는 말 외에 또 무슨 다른 뜻이 있겠습니다.
1년을 살았다는 말 또한 1년을 죽었다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살아간다는 말과 죽어간다는 말이 다를 것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농사짓고,
장사하고, 정치하고,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모두 살기 위함인데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비참하지만 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세상을 좌지우지 할 정도의 권력이 있어도 피해갈 수 없는 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일생은
죽음이라고 하는 큰 구렁이한테 뒷다리를 물려 끌려가는 개구리의 운명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구렁이한테 물린 개구리를 놓아줄지 말지는 구렁이가 결정할 것이지
개구리에겐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죽음도 .
인간의 자유의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죽음 그 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천하의 영웅과 만고의 호걸도
죽음 앞에선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저 순종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현실에 직면해 있으면서 마치 남의 일처럼 새까맣게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 세계 일체 중생이
누구나 다 업보 중생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견해 역시
업안(業眼)으로 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일체 중생은
이 업안을 해탈해 진리의 심안(心眼)으로 세상을 보고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진리의 법안(法眼)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심성수양(心性修養), 곧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함이니 견성해야 합니다
견성이란 자기 성품자리,
일체 만유의 본성자리, 곧 진리인 본심자리를 맑고 청정하게 가져 만사만리(萬事萬里)를 통찰할 줄 아는 혜안(慧眼)을 얻는 것입니다.
중생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이상하고 묘하게도 성품은 각자가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 못 보고 못 찾는 것이 묘한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각자가 지니고 있는 성품을 보고 이 고해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범부 중생은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과 재물에 대한 욕심, 색에 대한 욕심, 음식에 대한 욕심,
오래 살고자 하는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등 다섯 가지 즐거움을 누려보고자 하는 병에 걸린 환자들입니다.
그러나 탐.진.치
삼독과 오욕병을 고치지 않고는 자기 성품을 볼 수 없으니, 먼저 삼독과 오욕락을 버리고 육바라밀을 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죽음에 직면해 있는 일체 중생은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영원한 절대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사바세계라고 합니다.
사바세계는
모든 생명들이 살기 위해 서로 빼앗고 죽이고, 잡아먹는 하나의 수라장입니다.
현실은 과거 무량겁을 내려오며
서로가 지어 놓은 죄악의 업력으로 만들어진 인과응보의 결산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로가 지은 업력과 업보로
괴로운 재난이 눈앞에 전개됨은 피할 수 없는 인과응보의 법칙입니다
모든 중생들은 이것을 깊이 깨달아
자기 성품을 바로 봐야 할 것입니다.
성품을 보라함은
자신의 실체(實體), 존재성을 알라는 것이요. 나의 실체를 알라는 것은 나의 영원한 삶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것 이외에 또 무슨 일이 있단 말입니까.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 끝은 왜 보고 있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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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여기 꼭 머물다 가세요>
◈ 지나치게 고상하게 행동하지 말라
산의 높고 험한 때에는 나무가 없으나
계곡에는 초목이 무성하고,
물결이 센 여울에는 고기가 없으나
고요하고 깊게 고인 연못에는
물고기와 자라가 모여든다.
그러므로 군자는 너무 지나치게
고상한 행실과 조급한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전국시대 초나라의 대부였던 굴원은
왕에게 많은 간언을 하였으나 오히려 왕의
미움을 사 귀향을 가게 되었다.
본래 타고난 성품이 고결하였던 굴원은 평소
세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한 가지 흠이 있었다.
굴원이 귀양지로 가는 도중에 한 어부가 굴원을 알아보고
이렇게 물었다.
"나리의 이름은 천하에 자자한데 어쩌다 이렇게
되셨습니까?"
어부의 말을 들은 굴원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세상사를 모두 체념한 듯 먼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혼탁한 세상에 나 혼자만 맑고, 모두가 술 취한 자리에서
나 혼자만 멀쩡하여 이리 된 것이오."
굴원의 말을 들은 어부는 노를 저어 어디론가 떠나며
이렇게 노래했다.
"무릇, 성인은 세상을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혼탁하면 거기에 물드는 척도 해야하고,
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했으면 나 또한 취한 척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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