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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한 칼

탤런트 2007. 1. 20. 15:37
명성황후 시해한 칼’ 일본 신사에 ‘보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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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본 자객의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쓴 칼, 후쿠오카 신사에

명성황후 시해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칼이 일본에서 공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공동의장 정념, 철안 스님) 간사 혜문 스님은 8일 “최근 명성황후 장례에 관한 기록이 있는 왕실의궤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우연히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의 실체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스님에 따르면, 이 칼은 일본 후쿠오카의 ‘쿠시다’ 신사에서 보관중이다. 이 칼은 전체 길이 120㎝에, 칼날 부분이 90㎝ 길이이며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적혀 있다.




이 칼은 ‘히젠도’라고 불리우며 16세기 에도 시대에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으로 알려졌다. 스님은 “신사의 책임을 맡고 있는 켄노스케 궁사가 칼의 주된 용도는 전투용이 아닌 살상용이라고 말했다”며 “칼을 꺼내는 순간 방 안에 서슬퍼런 살기가 느껴졌다”고 느낌을 말했다. 칼은 메이지 41년(1908) 토오 가쓰아키란 자객이 신사에 기증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혜문 스님은 “켄노스케 궁사가 칼의 공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고 했지만 파장이 커지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눈치었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사를 전공한 조광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인데 그럴 수 있는 일”이라며 “시해 직후에 시해에 관련된 사람들이 일본으로 탈출했고, 이 당시 무기를 가져갔을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또 “당시 일본의 문화와 정서로 봤을때 신사에 보관시킨 것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내용은 혜문 스님과 함께 방일 취재를 벌인 문화방송에서 오는 13일 밤 <시사매거진2580>을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혜문스님은 “비록 칼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이번 방송을 통해 일제의 만행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토오 가쓰아키는 누구?

토오 가쓰아키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문인 쓰노다 후사코의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에는 사건 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쓰아키, 나(데라사키) 세 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고 적어놓았다. 이 책에는 “나카무라 다테오가 왕비의 침전인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쓰야키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라는 대목도 기재되어 있다. 토오 가쓰아키는 왕비의 침전으로 최초 난입한 3사람 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 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킨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훗날 토오 가쓰아키는 그 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 다시는 이 칼이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자료제공 : 조선왕조실록환수위



〈한겨레〉온라인뉴스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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