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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피카소-말라가

탤런트 2007. 1. 20. 17:36
 

天才의 우스꽝스런 그림이 살아 숨쉬는「말라가(Mala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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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도시이다. 지중해를 끼고

있어 휴양지로 유럽인들에게 사랑받는 도시이다

 

에메랄드빛의 지중해와 부드러운 햇살이 사람들의 발길을

유혹하는 스페인 남부의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안」

이라는 뜻)은 유럽인들에게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 그중에서도 「말라가」는 맑은 날이 320일이 넘고 연중

날씨가 따뜻하여 바다의 싱그러움을 즐기기 위해 수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도시이지만

말라가는 天才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현재 피카소가 태어난 生家는 「피카소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유년 시절에 그가 사용했던 의자·책상·화구·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지중해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말라가는 3000년

전 페니키아人들에 의해 도시가 건설된 후 구리·은·철광석

등과 같은 금속을 수출해 막강한 富를 축적하며 성장했다.

그 후 로마와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 전역을 지배할 때

말라가도 예외일 순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시내 곳곳에는

로마 유적들과 이슬람 유적들이 남아 있다.
 
  말라가 시내와 지중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히브랄파로

 城은 여행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11세기에 세워진 알카사바를 지나 작은 산책로를 따라

10여 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붉은 태양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지중해가 끝없이 펼쳐지고 발아래로는 항구,

투우장, 성당 등 말라가의 아름다운 시가지 풍경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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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말년에 낳은 아들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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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生家에는 그가 어렸을 때 사용했던 미술도구와 책상 등 다양한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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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 대성당은 1528~1782년에 이슬람사원이 있던 곳에 지어졌다. 원래 계획에

 의하면 두 개의 탑을 올리려고 했는데, 재정 부족으로 한 개의 탑만 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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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家 내부에는 피카소의 작품들과 가족사진들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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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家 내부에는 피카소가 세례받을 때 입었던 옷도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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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르 광장 바로 입구에 위치한 피카소 生家. 그는 이곳에서 1881년

10월25일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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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의 최대 중심지인 라리오스 거리는 일년 내내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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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세례를 받았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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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민족들이 머물렀던 말라가이지만 지금은 가톨릭을 상징하는

성화·조각상 등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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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이 카페에서 맥주 한잔으로 지중해의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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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는 12세기에 페니키아人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으며, 수세기 동안

카르타고人·로마人·무어人 등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다

 

1881. 10. 25 스페인 말라가~1973. 4. 8 프랑스 무쟁.

스페인의 화가.
[개요]

91년간의 전생애 중 80여 년을 미술에 바친 피카소는 회화·
조각·소묘·도자기·시 등의 무수한 작품으로 20세기
현대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피카소
Pablo Picasso가 그린 유화 〈Seated Harlequin〉(1923)

[초기생애]

그는 소묘를 가르치던 아버지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와 어머니
마리아 피카소 로페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10세가 되던 1891년
그의 가족은 라코루냐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울 때부터 피카소는 이미 남달리 뛰어난 소묘
실력을 발휘했다. 아들의 비범한 재능에 놀란 아버지는
자신의 야망을 온통 아들에게 쏟으며 어린 피카소에게
모델을 구해주었고 13세에 첫번째 개인전을 열도록
도와주었다. 1895년 가을 피카소의 가족은 다시 바르셀로나로
이사했으며 그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소묘를 가르치던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가족들은 피카소가 전통적인
화가로 성공하기를 바랐는데, 1897년에 그의 아버지를 모델로
그린 〈과학과 자선 Science and Charity〉이 마드리드 미술
전시회에서 가작 입선하자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이 젊은 화가가 명성을 얻고
가족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1897년
가을 피카소는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의 교수법이 따분하다고 느낀 피카소는
카페·사창가 등을 배회하며 그곳의 생활을 그리는 데 더
열중했으며, 프라도 미술관을 자주 찾아가 스페인 회화의
진수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벨라스케스가 최고이며 엘
그레코는 위대한 몇몇 대가들 가운데 속하는 반면, 무리요는
별로 감동을 주지 않는다"라고 썼다. 이곳에서 감상한 작품들은
평생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곤 했는데, 예를 들어 1898년
그가 이곳에서 묘사한 고야의 작품들, 즉 〈투우사 페페
이요의 초상 Portrait of the Bulfighter Pepe Illo〉과 한 뚜쟁이가
젊은 여인의 스타킹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묘
〈됐어 Bien tirada está〉에 나오는 인물들이 피카소의 후기
작품에도 등장한다. 1957년 제작한 인그레이빙 연작에 페페
이요가 재등장하며, 특히 〈판화집 347 Suite 347〉(1968)에
실린 일련의 에칭 및 인그레이빙 판화들에는 여자 뚜쟁이인
셀레스티나가 일종의 관음증적(觀淫症的)인 자화상으로 다시
나온다.

1898년 봄 피카소는 병에 걸려 바르셀로나에서 사귄 마누엘
파야레스와 함께 카탈루냐 지방의 오르타 데에브로에 가서
1년 내내 휴양을 하며 보냈다. 1899년초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는 미술학교의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의
성을 더 선호하여 작품에 종종 P.R. Picasso라고 서명했다.
1901년말경에는 서명에서 Ruiz를 완전히 빼버렸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파리를 동경하고 있던 카탈루냐
미술가·작가들의 모임에 참여했다. 그들은 파리의
카페 '검은 고양이'(Chat Noir)를 본뜬 그는 '4마리의
고양이'(Els Quatre Gats)에서 자주 모였다. 1900년 2월
그곳에서 그는 바르셀로나에서는 첫번째로 전시회를
가졌는데, 전시된 작품들은 그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양한 재료로 그린 초상화 50여 점이었다. 그밖에도
죽어가는 여인의 임종을 지키는 한 사제를 주제로 하여
그린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임종의 순간 Last Moments〉
도 전시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해에 열린 파리
국제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렸다.

피카소는 적절한 작업환경을 찾을 겸,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리를 직접 경험하고 싶어 동료인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카를로스 카사헤마스의
초상 Portrait of Carlos Casagemas〉, 1899)와 함께
파리로 가서 몽마르트르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첫 파리 방문]

피카소가 파리 여행중(10~11월)에 얻은 귀중한 미술적
성과는 색채의 발견이었다. 전통적인 스페인 회화의
충충한 색채, 스페인 여인들이 즐겨 걸치는 숄의 검정색조,
스페인 풍경에서 흔히 보게 되는 황갈색조나 갈색조가
아닌 반 고흐의 강렬한 색채와 국제박람회가 열리는
그 도시가 펼쳐보이는 전혀 새로운 색채를 경험한 것이었다.
피카소는 목탄·파스텔·수채·유채 등 다양한 매체로
파리의 생활을 묘사했다(〈거리의 연인들 Lovers in the Street〉,
1900). 또 〈물랭 드 라 갈레트 Moulin de la Galette〉
(1900)에서는 카탈루냐 출신의 라몬 카사스뿐만 아니라
 툴루즈 로트레크나 스탱랑 같은 프랑스 화가들을 모방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실연으로 의기소침해진 친구 카사헤마스
때문에 겨우 2개월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말라가에서 카사헤마스의 기분을 전환시켜줄 수 없게
되자 마드리드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새로운 잡지
〈젊은 미술 Arte Joven〉의 미술 편집장으로 일했다.
그는 카사헤마스의 자살로 심한 충격을 받았으나
그 사건은 감동적인 '청색 시기'의 작품들을 낳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몇 개월 후 1901년에
죽은 카사헤마스를 그린 2점의 초상화와 2점의 장례 장면,
〈조객들 Mourner〉·〈초혼(招魂) Evocation〉을 그렸다.
카사헤마스는 또한 1903년에 그린 수수께끼 같은 그림
〈인생 La Vie〉에서 예술가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두번 울지않는다 / 김란영
  
      이대로 떠날수 없는 아쉬움을 안은채 터벅터벅 힘없이 돌아서는 길 이슬비가 내린다 희미한 가로등불 어둠이 내리면 고개들어 한숨짓는 나를 보면서 빈하늘이 웃는다 그렇게 떠난 무정한 사랑을 이제는 용서하면서 가슴때리던 그 상처때문에 다시는 두번 울지 않는다 (간주) 모든 것 끝나고서 돌아서는 발길 부질없는 사랑에 가슴적시는 눈물비가 내린다 그렇게 떠난 무정한 사람을 이제는 용서하면서 가슴때리던 그 상처때문에 다시는 두번 울지 않는다 그렇게 떠난 무정한 사람을 이제는 용서하면서 가슴때리던 그 상처때문에 다시는 두번 울지 않는다 가슴때리던 그 상처때문에 다시는 두번 울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