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대웅전삼신불탱
보물 1363호
제작시기: 조선 영조
화엄사 대웅전에 보존되어 있는 그림으로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 등 삼신불을 그린 탱화인데,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를 말한다.
이 삼신불탱은 3폭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의 비로자나불탱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노사나불탱, 오른쪽에는 석가모니불탱을 각 한 폭씩 그렸다.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도는 화면 중앙 상단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인 문수·보현보살과 8대보살, 4위의 타방불과 6위의 제불, 사자와 코끼리 탈을 쓴 성중(호계대신(護戒大神), 복덕대신(福德大神))들이 에워싸듯 배치되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키 모양의 광배를 가지고 있는 본존불은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으며,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표현되어 있고, 무릎 폭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큼직하고 귀는 기다랗고, 다자색 법의의 깃을 따라 연두빛과 분홍빛깔의 보상화무늬가 장식되어 다소나마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보신(報身)인 노사나불도는 두 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려 설법하는 모습의 손모양에 보관을 쓴 보살형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8대보살과 사천왕상 2위, 4위의 타방불, 3신장과 4금강이 주위에 빙둘러 배치되어 있다. 단정한 귀·눈·입·코 등에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는 있으나, 둥근 머리광배에 보관을 쓰고 귀걸이·목걸이·팔찌·구슬 장식 등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보살형 불상으로서의 꾸밈이 돋보인다.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도는 유난히 몸광배가 큼직한 키형 광배에 악귀를 물리치는 뜻을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단에는 문수·보현보살을 포함한 6대보살과 함께 2구의 사천왕상을 그리고, 그 위로는 흔히 등장하는 타방불 대신 가섭·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제자 및 4금강과 3신장, 용왕·용녀를 에워싸듯 배치하였다.
이 삼신불탱은 18세기 조계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겸 스님 외 13명의 화원이 동원되어 그린 뛰어난 작품으로 필선이 섬세하며 녹색을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길이가 4m를 넘는 거대한 3폭의 화면에 삼신불을 완전히 갖춘 매우 드문 예로, 통도사대광명전삼신불도(보물 제1042호)와 더불어 18세기 삼신불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보물1348호 화엄사 서오층석탑사리장엄구(華嚴寺西五層石塔舍利莊嚴具)
종목 : 보물 제1348호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사리장치/ 사리장치
수량 : 일괄
지정일 : 2002.10.19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대 : 통일신라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
1995년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소재하고 있는 화엄사 경내 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의 해체보수작업을 하던 중 탑 내부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일괄 유물이다.
백지묵서다라니경, 청동불상범 외에 청동방울과 장식, 철제칼, 금속편, 수정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 중 백지묵서다라니경은 다라니경의 내용을 필사한 것으로, 고려시대 이전의 서적이나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통일신라기의 종이·글자체·문자 등 서지학적 혹은 불교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탑인은 한국 고대인쇄사에 있어서 초기단계를 알게 해주는 국내 유일의 실물자료이다.
청동불상범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유일한 불상주조용 틀로서 불상의 대량생산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화엄사 서오층석탑 발견유물은 통일신라시대 사회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할 수 있는 유물들로 서지학, 미술사 등 학술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종목 : 보물 제1040호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석각류
수량 : 8980점외일괄
지정일 : 1990.05.21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
석경(石經)은 경전의 원문을 돌판에 새긴 것인데, 화엄석경(華嚴石經)은 화엄경을 엷은 청색의 돌에 새긴 것이다.
통일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화엄사에 각황전을 세우고 이곳에 화엄석경을 보관하였다.
각황전의 안쪽 벽에는 현재 그림이 걸려 있으나, 원래는 여기에 화엄석경이 벽을 이루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경에는 네모진 돌들을 서로 맞추어 끼웠던 듯 모서리에 연결을 위한 홈이 파여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석경들이 파손되었고, 색깔도 회갈색 등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파손된 것을 모아 지금은 약 9천여 점이 남아 있다.
글씨체는 해서체로 최치원이 정강왕 2년(887)에 쓴 쌍계사 진감국사비문과 비슷한데, 당시의 글씨체를 잘 보여주고 있어 희귀한 석경의 대표적인 예로 주목되고 있다.
이 화엄석경은 우리나라 화엄종 사찰의 상징적 유물로서 비록 파편이기는 하나 신라 후기의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름 : 화엄사 동 오층 석탑(華嚴寺 東 五層 石塔)
문화재 : 보물 132호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
제작시기 : 통일 시날 시댸(9세기)
화엄사 대웅전 앞에는 동서로 쌍탑이 서 있다.
그 중에 동쪽에 서있는 것이 이 탑으로 크기는 서로 비슷하지만
서탑이 조각과 장식이 화려한 반면, 동탑은 아무런 장식없이 단정하다.
탑은 1층 기단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서탑의 기단이 2층인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탑신는 1층 몸돌이 높이에 비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또한 각 층 몸돌의 너비가 줄어드는 정도는 큰 것에 비해
높이의 줄어드는 정도가 적어 늘씬해 보인다.
지붕돌은 매우 평평하고 얇은데 몸돌을 따라 너비의 줄어드는 정도가 큰 편이며,
그 중 1층과 2층의 차이가 한층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있고,
다시 사잇기둥을 두어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이 2층 기단인데 비해 1층 기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돌구성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는 서탑과 비슷한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종 목 보물 300호
명 칭 화엄사원통전전사자탑
(華嚴寺圓通殿前獅子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화엄사
관리자 화엄사
화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을 널리 알리던 절로,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사상의 구현을 이루어 왔다. 신라 후기에는 승려 도선(道詵)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고, 고려 문종 때에는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바치도록 허락해 주어 일주문 밖에 큰 창고를 짓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7년 만에 여러 건물들을 다시 세웠으며, 이후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탑은 절 안의 원통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무늬없는 석재로 구성된 소박한 모습이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탑신(塔身)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이곳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이나, 조각수법은 이에 못미처 이보다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종 목 보물 299호
명 칭 화엄사대웅전
(華嚴寺大雄殿)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화엄사
관리자 화엄사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큰 절이었고,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탄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중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화엄사의 건물 중 각황전(국보 제67호)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인조 8년(1630)에 벽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든 우물 천장이며, 삼존불 위쪽으로 장식적인 성격을 띠는 지붕 모형의 닫집을 놓아 엄숙한 분위기를 한층 높이고 있다.
규모도 크고 아름다우며 건축 형식의 특징과 균형이 잘 잡혀있어 조선 중기 이후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종목 : 보물 제133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 : 1기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대 : 통일신라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
화엄사 올벚나무(천연기념물 제38호)
소 재 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20-1
지정면적 : 1주175㎡
지 정 일 : 1962-12-03
올벚나무는 황해도, 지리산, 보길도 및 제주도에서 자란다. 꽃이 잎보다 먼저 피고 다른 벚나무보다 일찍 꽃이 피기 때문에 올벚나무라고 부른다. 화엄사의 올벚나무는 나이가 약 3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2m, 뿌리부분 둘레 4.42m이다. 병자호란(1636) 이후 인조(재위 1623∼1649)는 오랑캐에게 짓밟혔던 기억을 되새기며 전쟁에 대비하고자 활을 만드는데 쓰이는 벚나무를 많이 심게 했다. 당시 화엄사의 벽암스님도 그 뜻에 찬성하여 주변에 올벚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그 중의 한 그루가 살아남은 것이다. 화엄사의 올벚나무는 나라를 지키려는 조상들의 의지가 담겨있는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수령(樹齡)은 300년이 넘고,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2m, 뿌리부분 둘레는 4.42m이다. 두갈래로 갈라진 줄기 중 큰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는 2.41m이고, 작은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는 0.9m이다. 이른 봄에 꽃이 피는 벚나무의 일종(一種)으로 화엄사(華嚴寺)의 맞은편 암자(庵子) 앞에서 자라고 있다. 화엄사(華嚴寺) 앞을 흐르는 냇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며 80여년 전까지 두 그루가 남아 있었으나 한 그루는 절을 수리할 때 베어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나무의 판자 한 조각으로 적묵당(寂墨堂)의 안마루를 깔고도 남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거목(巨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올벚나무의 주변에 자라는 나무로서는 푸조나무,서어나무, 동백, 팽나무, 갈참나무, 느티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올벚나무도 1945년 8월 폭풍으로 나무줄기의 가운데가 부러져 수세(樹勢)가 많이 약해졌다. 벚나무는 무기(武器)를 만드는데 중요(重要)한 자원이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는 오랑캐에게 짓밟혔던 옛날을 생각하여 무기(武器)를 만드는 자원식물(資源植物)인 벚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다. 이때 벽암대사(碧岩大師)가 화엄사 근처에 많은 벚나무를 심었는데, 그 중 한 나무가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로 지정된 것이다. 이른 봄에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아름답게 핀다
구례 화엄사의 홍매화 붉은 향기가 1000년의 사찰 휘감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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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타오르는 홍매화가 화엄사의 봄을 알립니다. 지리산 아랫마을 섬진강변의 매화와 산수유가 시들어갈 무렵이면 화엄사 홍매화는 달아오릅니다. 여인의 입술처럼 붉디붉은 홍매화의 향취에 취해 절정으로 치닫는 봄을 느낍니다.
홍매화 흐드러진 이곳은 1000년 고찰 화엄사 경내에서도 불교 설화의 신비가 가득한 각황전(覺皇殿ㆍ국보 제67호) 앞뜰입니다. 우리나라 최대 불전이자 현존하는 최대 목조건물인 각황전은 본래 장육전(丈六殿)이라 불렸습니다. 신라 의상대사께서 사방 돌벽에 화엄경을 새기고 장육황금입불상(丈六黃金立佛像)을 모셨던 곳입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장육전은 숙종 때 중건됐습니다. 계파(桂波)선사가 백일기도를 드리며 중건 불사(佛事)를 발원했고, 화엄사에서 누룽지를 얻어먹던 거지노파가 연못에 몸을 던진 후 공주로 환생해 불사를 완성시켰다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환생한 공주는 화엄사 공양주 스님을 만난 후에야 꼭 쥐고 있던 한쪽 손을 폈다고 하는데 손바닥에 ‘장육전’이라 쓰여있었다고 합니다. 감격한 숙종께서 공주를 위해 중건 비용을 하사했고,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사액했다고 합니다.
각황전 앞뜰의 홍매화는 계파선사께서 심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일명 ‘장육화’라고도 불립니다. 신심(信心) 가득한 설화와 홍매화 어우러진 봄이 마냥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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