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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 화엄사 각황전
종 목 : 국보 67호 명 칭 : 화엄사각황전 (華嚴寺覺皇殿) 분 류 : 사찰건축 수 량 : 1동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제작시기 : 조선 숙종 25년(1699)부터 약 4년간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원융부동(圓融不動)의 무량법계 신라시대 이래로 지리산은 다섯 명산 중의 하나이며 천제를 지내던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그 산과 같이 광대한 법계처럼 느껴지는 화엄사로 가는 길에 잠시 멈추니, 구름너머 높고 장대한 연봉들과 물 건너 깊고 오묘한 골짜기들이 서로 조화롭게 틀고 휘어들며 사라진다. 각황전의 전신인 장육전을 초창했던 의상은 〈화엄경〉의 내용을 포섭한 〈법성게〉에서 “진성(眞性)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룬다(成)”라고 노래하였다. 예술과 종교는 진성의 인식을 미(美)로서 실천한다는 것으로는 동질의 의미이다. 그러나 때때로 철학적 사유에 의한 진리의 인식이 인간에게는 유효하나 예술에는 유효하지 않음을 발견할 때 예술의 초월성을 느낀다. 화엄사는 그러한 예술의 초월성과 함께 화엄의 종풍을 건축으로 드러내어 원융무애한 화엄법계에 증입(證入)할 수 있게 한다. 빛도 없고 형상도 없는 존재신라 진흥왕 5년에 창건되어 화엄종의 본산이었으며 후기에는 선교(禪敎)양종의 대본산이었던 사찰답지 않게 작은 담으로 가린 소담한 일주문을 통과하면 휘어진 길과 통로 양측의 수목들사이로 차례차례 드러내는 동적 장면이 있다. 그 시점의 끝에 있는 금강문을 나오면 수직의 석단들 위로 천왕문과 보제루까지 이어서 나타나게 하는 산지사찰의 점진적 유도방법을 보게 된다. 그러나 화엄사는 측면에서 사선방향으로 바라보게 하여 천왕문의 정면과 우측면, 그리고 다음 목표인 보제루까지 중첩해서 보이는 입체적이고 동적인 지각을 하도록 유도한다. 주불전의 중심 공간에 이르지 않고 부분만으로도 무한한 생명적 법성이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화엄의 조형정신을 엿볼 수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좁았던 시야가 넓게 개방되면서 보제루만 보이는 것 같지만 왼편 상부의 사사자탑에서 시작하여 영산전과 각황전, 그리고 원래 지금보다 작고 멀리 있던 종각이 푸른 송림과 함께 종교적으로 승화된 천상세계의 건축인 듯 기대되는 상승 공간으로 시야에 펼쳐있다. 화엄경의 노사나품에는 항상 유전(流轉)하여 변하는 일체의 법은 부처님의 법신으로 불가사의하여 빛도 없고 형상도 없고 아무것에도 비교할 수 없으나 모든 세계는 여러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 하듯 보제루 뒤로 펼쳐진 그 형상의 세계로 비로자나 부처님의 불법을 설하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 누마루형식의 보제루를 돌아서면 탑과 석축 위의 건물들과 비로봉의 잡화엄식이 텅 빈 마당에서 극적인 반전을 하여 한눈에 파노라마로 전개된다. 눈앞에 펼쳐진 총상의 무한 장면은 인식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한정된 공간의 형상이나 빛도 아니다. 상즉상입의 연기의 존재와 같이 개별적인 별상은 “많은 덕을 포함한 하나”로서의 총상을 의지하고 있는 화엄사상의 무량법계이다. 높이 4m, 길이 100m 이상되는 장대한 석축은 상승공간으로서 다양한 건물군을 하나의 전체로서 조화되고 통일되게 하였고 각황전과 원통전 그리고 대웅전의 주 건물은 합각지붕으로, 주변건물은 맞배지붕으로 하여 주 불전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동시에 서로 맞물리게 하였다. 또한 진입부에서처럼 건물들을 다른 각도로 틀어 각황전의 좌측면과 대웅전의 우측면까지 동시에 보이는 입체적이고 변화적인 배치를 하여, 시선의 흐름을 수평적 흐름에서 비로봉까지 수직적 상승으로 연결하여 화려하면서 우아한 위엄과 섬세하면서 당당한 기품의 시각적 조화와 공간적 연속감을 준다. 마치 화엄경 입법계품의 비로자나장엄장 누각처럼 “크고 화려하기가 허공과 같아 서로 장애되지도 않고 어지럽게 섞이지도 않는다. 선재가 한 곳에서 모든 곳을 보듯 모든 곳에서 다 이와 같이 보았는바”, 이곳의 모든 건물은 생명적 원리의 조화를 전개하여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 속에 들어오는 무이(無二)의 법성을 표현한 법계가 되었다. 모든 생명은 조화를 꿈꾼다인조 8년(1630)에 중건된 대웅전과 숙종 29년(1703)에 중건된 각황전은 주불전인 대웅전의 중심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멀리 있으나, 또한 화엄종의 주존인 비라자나불을 봉안하고 있기에 더 큰 2층 건물의 1탑 배치처럼 지어서 조화와 대조를 동시에 표현하였다. 70년이나 늦게 세워졌음에도 각황전은 먼저 지어진 단층건물인 대웅전을 강조하여 느끼게 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크나 모든 면에서 대웅전보다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비교된 절제를 통해 또 다시 화려한 별상을 취하고 있기에 각(覺)의 황(皇)으로서 부동하나 자유자재한 경계의 조화된 모습으로 있다. 모든 생명은 조화를 꿈꾼다. 생명은 홀로 존재할 수 없기에 조화롭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다. 본능적으로 조화는 작위적이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가 배제된 것으로 개별화되기에 앞서 하나라는 생명의 본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개별성은 다의적으로 언표되며 서로 부딪혀 상충적 욕구들을 추구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난 미의 상태에 다가가는 것이다. 조화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동일성의 발견이다.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나 서로 다르기만 하지도 않다”는 원효의 비일비이(非一非異)사상도 “다른 것과의 차이의 확인은 동일한 것을 해명한다”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도 결국 동일성에의 발견이다. 화엄사는 조화라는 추상적 진모(眞貌)를 형상의 충만함으로 선명한 세계를 펼친다. 조화에 있어 체계란 없다고 말하는 듯 이성적 비례나 서로가 대응되는 건축의 규칙들은 화엄으로 존재하여 쉽게 느낄 수 없다. 총상과 별상으로 구분 및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건물들이 땅과 산과 하늘처럼 조응(照應)하고 화엄의 규칙들 속에서 수많은 움직임이 발견된다. 생명적 동일성 안에 다시 개별적 화엄이 자리하고 있는 각황전은 화엄미의 본질을 품고 있는 실체적 공간이다. 밖에선 2층이나 내부는 통층으로 그 높이를 짐작하기 힘든 고주들 사이로 사면의 고창을 통해 들어오는 은근한 빛의 광휘는 공간과 합하여 단청의 색과 화하여 화해하는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시각과 청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 아닌 영혼에 의해 인식된 듯한 탈색되지 않을 광휘는 부처님의 반 쯤 감긴 눈꺼풀 아래로 인간의 불안과 절실한 갈망들과 마주할 뿐 열정과 엄격은 없다. 그저 아름다움만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미(美)는 신의 본성미는 모든 생명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초월하게 하는 근원적 힘을 내포하고 있다. 가르쳐 준 것이 아닌 생명체 스스로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미적 정화의 기능은 두려움에 취약한 모든 생명체들 간에 사랑과 연민을 자아내며 화엄의 대라천을 이룬다. 사랑과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감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정성으로 가꾼 꽃이 잘 자라듯이 사랑은 생식적 본능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조화롭고자 하는 자연의 욕구이다. 진정한 미는 신의 본성이라 한다. 그래서 인류는 아름다워야 하는 신의 본성과 조우할 수 있는 종교 공간을 그토록 아름답게 표현해 내고자 하였을까. 그리고 그 미의 공간에서 진성을 깨달으며 신성과 합한 존재이고자 하였던가. 화엄의 추구는 신성과 맞닿아 있다. 모든 존재가 구별없이 통합되는 원융이 화엄의 법성이듯 이 곳에서는 모든 것이 조화를 꿈꾸는 본래 고요한 자연적 사랑인 자비에 스스로 동화된다.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원융부동(圓融不動)의 무량법계
신라시대 이래로 지리산은 다섯 명산 중의 하나이며 천제를 지내던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그 산과 같이 광대한 법계처럼 느껴지는 화엄사로 가는 길에 잠시 멈추니, 구름너머 높고 장대한 연봉들과 물 건너 깊고 오묘한 골짜기들이 서로 조화롭게 틀고 휘어들며 사라진다.
각황전의 전신인 장육전을 초창했던 의상은 〈화엄경〉의 내용을 포섭한 〈법성게〉에서 “진성(眞性)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룬다(成)”라고 노래하였다.
예술과 종교는 진성의 인식을 미(美)로서 실천한다는 것으로는 동질의 의미이다. 그러나 때때로 철학적 사유에 의한 진리의 인식이 인간에게는 유효하나 예술에는 유효하지 않음을 발견할 때 예술의 초월성을 느낀다. 화엄사는 그러한 예술의 초월성과 함께 화엄의 종풍을 건축으로 드러내어 원융무애한 화엄법계에 증입(證入)할 수 있게 한다.
빛도 없고 형상도 없는 존재신라 진흥왕 5년에 창건되어 화엄종의 본산이었으며 후기에는 선교(禪敎)양종의 대본산이었던 사찰답지 않게 작은 담으로 가린 소담한 일주문을 통과하면 휘어진 길과 통로 양측의 수목들사이로 차례차례 드러내는 동적 장면이 있다. 그 시점의 끝에 있는 금강문을 나오면 수직의 석단들 위로 천왕문과 보제루까지 이어서 나타나게 하는 산지사찰의 점진적 유도방법을 보게 된다. 그러나 화엄사는 측면에서 사선방향으로 바라보게 하여 천왕문의 정면과 우측면, 그리고 다음 목표인 보제루까지 중첩해서 보이는 입체적이고 동적인 지각을 하도록 유도한다. 주불전의 중심 공간에 이르지 않고 부분만으로도 무한한 생명적 법성이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화엄의 조형정신을 엿볼 수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좁았던 시야가 넓게 개방되면서 보제루만 보이는 것 같지만 왼편 상부의 사사자탑에서 시작하여 영산전과 각황전, 그리고 원래 지금보다 작고 멀리 있던 종각이 푸른 송림과 함께 종교적으로 승화된 천상세계의 건축인 듯 기대되는 상승 공간으로 시야에 펼쳐있다. 화엄경의 노사나품에는 항상 유전(流轉)하여 변하는 일체의 법은 부처님의 법신으로 불가사의하여 빛도 없고 형상도 없고 아무것에도 비교할 수 없으나 모든 세계는 여러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 하듯 보제루 뒤로 펼쳐진 그 형상의 세계로 비로자나 부처님의 불법을 설하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 누마루형식의 보제루를 돌아서면 탑과 석축 위의 건물들과 비로봉의 잡화엄식이 텅 빈 마당에서 극적인 반전을 하여 한눈에 파노라마로 전개된다. 눈앞에 펼쳐진 총상의 무한 장면은 인식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한정된 공간의 형상이나 빛도 아니다. 상즉상입의 연기의 존재와 같이 개별적인 별상은 “많은 덕을 포함한 하나”로서의 총상을 의지하고 있는 화엄사상의 무량법계이다. 높이 4m, 길이 100m 이상되는 장대한 석축은 상승공간으로서 다양한 건물군을 하나의 전체로서 조화되고 통일되게 하였고 각황전과 원통전 그리고 대웅전의 주 건물은 합각지붕으로, 주변건물은 맞배지붕으로 하여 주 불전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동시에 서로 맞물리게 하였다. 또한 진입부에서처럼 건물들을 다른 각도로 틀어 각황전의 좌측면과 대웅전의 우측면까지 동시에 보이는 입체적이고 변화적인 배치를 하여, 시선의 흐름을 수평적 흐름에서 비로봉까지 수직적 상승으로 연결하여 화려하면서 우아한 위엄과 섬세하면서 당당한 기품의 시각적 조화와 공간적 연속감을 준다. 마치 화엄경 입법계품의 비로자나장엄장 누각처럼 “크고 화려하기가 허공과 같아 서로 장애되지도 않고 어지럽게 섞이지도 않는다. 선재가 한 곳에서 모든 곳을 보듯 모든 곳에서 다 이와 같이 보았는바”, 이곳의 모든 건물은 생명적 원리의 조화를 전개하여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 속에 들어오는 무이(無二)의 법성을 표현한 법계가 되었다.
모든 생명은 조화를 꿈꾼다인조 8년(1630)에 중건된 대웅전과 숙종 29년(1703)에 중건된 각황전은 주불전인 대웅전의 중심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멀리 있으나, 또한 화엄종의 주존인 비라자나불을 봉안하고 있기에 더 큰 2층 건물의 1탑 배치처럼 지어서 조화와 대조를 동시에 표현하였다. 70년이나 늦게 세워졌음에도 각황전은 먼저 지어진 단층건물인 대웅전을 강조하여 느끼게 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크나 모든 면에서 대웅전보다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비교된 절제를 통해 또 다시 화려한 별상을 취하고 있기에 각(覺)의 황(皇)으로서 부동하나 자유자재한 경계의 조화된 모습으로 있다.
모든 생명은 조화를 꿈꾼다. 생명은 홀로 존재할 수 없기에 조화롭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다. 본능적으로 조화는 작위적이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가 배제된 것으로 개별화되기에 앞서 하나라는 생명의 본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개별성은 다의적으로 언표되며 서로 부딪혀 상충적 욕구들을 추구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난 미의 상태에 다가가는 것이다. 조화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동일성의 발견이다.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나 서로 다르기만 하지도 않다”는 원효의 비일비이(非一非異)사상도 “다른 것과의 차이의 확인은 동일한 것을 해명한다”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도 결국 동일성에의 발견이다.
화엄사는 조화라는 추상적 진모(眞貌)를 형상의 충만함으로 선명한 세계를 펼친다. 조화에 있어 체계란 없다고 말하는 듯 이성적 비례나 서로가 대응되는 건축의 규칙들은 화엄으로 존재하여 쉽게 느낄 수 없다. 총상과 별상으로 구분 및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건물들이 땅과 산과 하늘처럼 조응(照應)하고 화엄의 규칙들 속에서 수많은 움직임이 발견된다. 생명적 동일성 안에 다시 개별적 화엄이 자리하고 있는 각황전은 화엄미의 본질을 품고 있는 실체적 공간이다. 밖에선 2층이나 내부는 통층으로 그 높이를 짐작하기 힘든 고주들 사이로 사면의 고창을 통해 들어오는 은근한 빛의 광휘는 공간과 합하여 단청의 색과 화하여 화해하는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시각과 청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 아닌 영혼에 의해 인식된 듯한 탈색되지 않을 광휘는 부처님의 반 쯤 감긴 눈꺼풀 아래로 인간의 불안과 절실한 갈망들과 마주할 뿐 열정과 엄격은 없다. 그저 아름다움만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미(美)는 신의 본성미는 모든 생명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초월하게 하는 근원적 힘을 내포하고 있다. 가르쳐 준 것이 아닌 생명체 스스로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미적 정화의 기능은 두려움에 취약한 모든 생명체들 간에 사랑과 연민을 자아내며 화엄의 대라천을 이룬다. 사랑과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감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정성으로 가꾼 꽃이 잘 자라듯이 사랑은 생식적 본능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조화롭고자 하는 자연의 욕구이다. 진정한 미는 신의 본성이라 한다. 그래서 인류는 아름다워야 하는 신의 본성과 조우할 수 있는 종교 공간을 그토록 아름답게 표현해 내고자 하였을까. 그리고 그 미의 공간에서 진성을 깨달으며 신성과 합한 존재이고자 하였던가. 화엄의 추구는 신성과 맞닿아 있다. 모든 존재가 구별없이 통합되는 원융이 화엄의 법성이듯 이 곳에서는 모든 것이 조화를 꿈꾸는 본래 고요한 자연적 사랑인 자비에 스스로 동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