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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뭐꼬 (성철) 법어집 발췌

탤런트 2007. 6. 7. 12:04

이뭐꼬(성철 법어집 발췌)  2002년 10월 발행 원택 엮음

 

  『이뭐꼬』는 성철 스님 법어집 11권중 주요한 것을 발췌한 것이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것을 법어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으로 각박한 삶에 지침을 주는 말이 많아 그 중 마음에 닿는 것을 발췌하였다.  숫자는 쪽수

  긴 문장은 인터넷에서 법어를 받은 것이다. 더욱 상세한 법문을 보려면 아래를 클릭하라.

  http://www.songchol.net/ven-songchol/v-main-3.htm# 성철 법문집

    2005년 12월 1일  진장춘

 

 

천대(박해를 즐거워하라)  67

천하에 가장 용맹스러운 사람은 남에게 질 줄 아는 사람이다. 무슨 일에서든 남에게 지고 밟히는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은 있다.

 천대받고 모욕 받는 즐거움이여, 나를 무한한 행복의 길로 이끄는도다. 남에게 대접받을 때가 내가 망하는 때다. 나를 칭찬하고 숭배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수도를 방해하는 제일의 마구니며 도적이다.

중상과 모략 등 온갖 수단으로 나를 괴롭히고 헐뜯고 욕하며 해치고 괄시하는 사람보다 더 큰 은인은 없으니, 뼈를 갈아 가루를 만들어 그 은혜를 갚으려 해도 다 갖기 어렵거늘 하물며 어찌 원한을 품는단 말인가?

   

 

열반송 179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렀도다.

 

오도송 178

황하수가 서쪽으로 흘러 곤륜정상으로 치솟으니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땅이 꺼지는도다

문득 한 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도다.

 

남을 위한 기도 16

남을 위해 기도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남을 자꾸 돕고 남을 위해 자꾸 기도하면,

결국 선한 결과가 모두 내게로 돌아오게 된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에 의해 그 행복이 내게로 전부 다 오는 것이다.

 

참다운 운명 19

인과가 있을 뿐이지 결정적인 운명이란 없다.

콩 심은 데 콩나고, 괄 심은 데 팥 나는

우주의 근본 법칙대로 모든 결과는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결과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힘써 노력하면, 자연히 좋은 결과가 따라오게 마련이다. 여기에 바로 큰 자유의 원리가 깔려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결과가 원인에 반비례하는 일도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노력이 부족한 것이지 운명은 아니다.

자력을 다했을 때에야 타력 나타나는 것이다.

 

행복은 인격에 있다 21

행복은 인격에 있지 물질에 있지 않다.

부유하더라도 인격이부족하면 불행하고,

궁핍하더라도 인격이 훌륭하면 행복하다.

 

 

마음 거울의 때를 벗기는 법 27

마음의 눈을 새로이 가져야 한다고 해서 마음을 새로 만들고

눈을 새로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본래의 눈을 되찾자는 것이다.

거울의 먼지를 밖아 내면 본래의 밝은 거울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가장 빠른 방법은 참선을 해서 화두를 바로 깨치는 것이다.

그 순간 거울의 모든 때는 한 번에 벗겨져 버린다.

또 다른 방법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거울에 묻은 때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자꾸 남을 돕다 보면 점차 업이 녹아 사라진다.

욕심이 다 사라지면 마음 거울의 때 역시 조금도 남지 않고 사라져

마침내 온 천지광명을 비출 수 있게 된다.

 

 

봉사와 구제 40 구제는 없고 봉사가 있다.

 

남을 돕는 것이 바로 불공이다. 흔히 남을 돕는다고 하면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에게 무언가 베푸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남을 도울 줄 모르는 것이다. 나이 든 부모를 모시듯, 배고픈 스승께 음식을 드리듯, 떨어진 옷을 입으신 부처님께 웃을 지어 올리듯 남을 항상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남을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하고 가난한 상대를 불쌍한 생각으로 돕는다는 의미의 '구제'는 불교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이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배고픈 부처님, 옷 없는 부처님, 병든 부처님이 있다

이들 무수한 부처님들을 효자가 성심으로 섬기는 것이 곧 불교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봉사는 있지만 구제는 없다.

 

 

보살도44

菩薩道는 인간 생활의 근본이며 행복의 극치로서 자기를 아주 버리고 오직 남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이다. 나만을 중심으로 살게 되면 욕심의 노예가 되어 모든 죄악과 불행이 따라온다. 나를 잊어버리고 남을 이롭게 하는 생활을 계속하면, 자연히 인격이 순화되어 영원하고무한한자기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47

‘ 나를 가장 해치는 자를 가장 높이 받든다.’

이것이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고, 불교의 근본 사상이다. 이렇게 행동하고 생활해야만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고, 법당에 앉을 자격이 있다.

 

 

거울 52

불교에서는 본래 마음자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한다.

거울은 언제든지 항상 밝다. 하지만 거기에 먼지가 쌓이면 거울의 환한 빛은 사라지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한다. 망상은 맑은 거울 위의 먼지와 같고, 무심이란 거울 자체와 같다.

이 거울 자체를 불성이니 본래면목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망상을 다 버린다는 말은 모든 먼지를 다 닦아 낸다는 뜻이다.

거울에 낀 면지를 다 닦아 내면 환한 거울이 나타난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맑고 밝은 광명이 나타나서 일체만물을 다 비춘다.

우리 마음도 이와 똑같다. 이것이 참다운 열반이고, 해탈이며 대자유인 것이다.

 

세 가지 장애 53

마음을 닦는 데는 세 가지 장애가 있다.

첫째는 돈이다.

둘째는 색욕이다. 이것까지는 모두가 알 것이다.

마지막 한 가지는 명예 곧 이름을 드러내려는 병이다. 이것은 앞의 두 가지보다 더 이겨 내기가 어렵다. 돈도 필요 없고, 여자도 내 앞에는 어른거리지 못한다고 큰소리친다. 그러나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내가 이토록 장한 사람이고, 큰 도인이라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오직 이름을 내기 위하여 청정한 척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병은 재물병과 여자병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다.

재물병과 여자병에 걸리면 주위에서 남들이 욕을 하지만,

이름 병에 걸리면 남들이 더 칭찬해 주니 고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이 세 가지 병을 완전히 고치고 이겨 내야만 비로소 마음 닦는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것이다

 

 

도독

일반적으로 돈이나 물건을 남에게서 뺏거나 훔치는 자를 도둑이라 한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뺏는 자를 두고는 영웅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영웅이 더 큰 도둑인데도 말이다. 우리 사회는 좀도둑은 도둑이라 하고, 큰 도둑은 영웅이라 한다.

그러나 진짜 큰 도둑은 스스로 성인인 체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도 잘 모르면서 남을 속인다. 성인이나 철인인 체하면서 아는 체하고 남을 속이는 게 진짜 도둑이다.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 (1981년 6월 28일, 정초우(鄭草宇) 총무원장 취임식)

   천지는 나와 같은 뿌리요 만물은 나와 같은 몸입니다.

천지 사이에 만물이 많이 있지만은 나 외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남을 도우는 것은 나를 도우는 것이며,

남을 해치는 것은 나를 해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해치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이치를 깊이 깨달아 나를 위하여 끝없이 남을 도웁시다.

바위 틈 돌호랑이 일어서서 소리치니

허공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말라버렸네.

크게 웃고 돌아서서 먼 곳을 바라보니

붉은 산호가지 마다 달빛이 찬란하다

 

 

하심 68

좋고 영광스러운 것은 항상 남에게 미루고, 남부끄럽고 욕된 것은 남모르게 내가 뒤집어쓰는 것이 수도인의 행동이다. '항상 자기의 허물만 보고 남의 시비와 선악은 보지 못한다' 는 육조 대사의 말씀이야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눈이다. 도가 높을수록 마음은 더욱 낮추어야 하니 , 모든 사람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고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긴다. 어린이나 걸인이나 어떠한 악인이라도 차별하지 않고 극진하게 존경한다. 낮은 자리에 앉고 서며, 끝에서 수행하여 남보다 앞서지 않는다 음식을 덕을 때나 물건을 나눌 때, 좋은 것은 남에게 미루고 나쁜 것만 가진다. 언제든지 고되고 천한 일은 자기가 한다.

 

가장 낮은 곳이 바다가 된다 79

 

스스로 자신이 잘나지 못함을 철저히 깨달아 모두를 부처님과 같이

섬기게 되면, 일체가 나를 부처님과 같이 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낮은 곳이 자연히 바다가 되나니, 이것은 일부러 남에게 존경을 받으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남에게 존경을 받을 생각이 있으면, 남이 존경하지 않는 이다.

 

****** 도란 무엇인가

(禪)은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일이다. '나는 무엇인가?'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물음이다.

 

인생은 빈손으로 와 빈손으로 가는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는 것은 일어나는 한 조각 구름 같고,

죽는 것은 흩어지는 한 조각 구름 같다.

떠 있는 구름은 본래 없는 것.

살고 죽고, 오며 가는 것도 그런 것.

그러나 늘 맑은 대로 머무르는 한 물건이 있다.

그것은 홀로 항상 청정하여 생사(生死)에 기대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항상 청정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한 물건인가?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깨닫는다면 생사에 걸림이 없이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어떻게 생사에 걸림 없는 자유를 깨달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목표가 분명하면 생활이 밝아진다. "왜, 선(禪)을 수행하는가?", "왜 날마다 먹는가?"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모두 놓아 버려라. 그 다음엔 우리의 견해나 조건, 상황을 모두 놓아 버리고 다만 행할 뿐이다.

 

거기에는 주인과 객, 안과 밖이 따로 없다. 안과 밖은 이미 하나가 되고 너와 나의 목표, 행동이 같게 된다. 이것은 위대한 보살의 길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 그러면 마음이 하늘처럼 깨끗해서 거울처럼 맑다. 붉은 것은 붉게, 흰 것은 희게 보인다.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준다. 모든 것이 이 맑은 거울에 비쳐서 보인다.

 

그러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하늘은 푸르고 나무는 파랗다.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다. 개는 '멍멍' 짖는다. 바로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그대로 진리이고 우리 또한 진리이다.

 

그러면 진리가 어떻게 바르게 작용하여 우리의 삶을 올바로 이끌어갈 것인가? 남이 배고플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부처님을 만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담뱃재를 어디에 털 것인가?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다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온전히 실천하면 우리의 평상심은 올바른 삶이 된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는 게 너무 많다. 그러나 그 안다고 하는 것은 삶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는데, 만약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인가? 아무리 특별한 경험이 있고 선(禪)에 대한 이해가 깊다 해도 순수하고 깨끗한 그 하나를 얻지 못한다면 특별한 경험과 선(禪)을 이해하는 것은 여러분의 수행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禪)수행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를 뿐'을 실천하는 것이다.

 

옛날 조주(趙州)선사가 남전선사에게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평상심이니라."

"그러면 그것을 계속 간직하려고 애써야 합니까?"

"애쓰면 그르친다."

"애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것과 상관이 없다. 안다고 하는 것(知)은 망상이고, 모른다고 하는 것은 무기(無記)이다. 의심 없이 도달하는 도는 허공과 같이 맑고 넓은데 어찌 옳다 그르다 시비를 가릴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들은 조주선사는 크게 깨달았다. 조주선사는 무엇을 깨달아 얻었나?

(禪)수행자들은 자주 '무엇을 지니려'한다. 하지만 그것이 큰 잘못이다. 앞서 말한 대로 안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아는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올바른 수행은 그 아는 것을 잘 소화하여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참다운 평상심이다.

 

그러면 왜 공안 365개를 만들었을까? 세상 사람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우리는 지식 치료제를 써야 한다. 조주(趙州)는 무엇을 얻었나? 입을 열어 말하면 벌써 실수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으면, 순수하고 깨끗한 답은 항상 앞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참 '나'가 진리를 올바르게 수용하고 중생을 구제할 것인가?

 

(道)는 위대한 어머니

비었어도 끊임없이

온 세상에 생명을 준다.

(道)는 항상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한다.

(道)는 어떻게 끝없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가? 이것도 같은 관점이며 같은 문제이다.

 

이 글에서는 불교적인 공안, 기독교적인 공안, 도교적인 공안, 선(禪)적인 공안이 실려 있다. 오래된 공안도 있고 새로운 공안도 있지만, 모두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 흥미로운 공안 이야기에 집착하거나 여러분의 견해에 매달린다면 그 공안의 참뜻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견해나 조건, 상황을 모두 놓아 버려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은 하늘같이 맑아져서, 어떤 공안에 대해서도 저절로 정답이 나온다. 그것이 지혜(예지)이다.

 

여러분이 공안을 받았을 때 설사 그 공안의 뜻을 알 수 없다해도 걱정하지 말라. 그 공안에 집착하지도 말고, 또 그 공안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말라. 오직 '모를 뿐'인 마음을 지키며 천 년, 만 년이 지나도록 쉬지 말고 정진하여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도(道)와 진리, 인생을 깨달아 매 찰나 찰나마다 올바른 상황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진리를 올바르게 수용하게 된다. 이것이 위대한 사랑, 위대한 자비, 위대한 보살의 길이다.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敎)밖의 것을 따로 전하니,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

본성을 바로 보아 부처가 된다. 만일 이 문에 들어서거든, 일체 생각을 내지 마라.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一切法)은 모든 마음(一切心)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만일 모든 마음이 없다면 모든 법이 무슨 소용인가?

 

아무 것도 만들지 않고 찰나 찰나 '오직 행할 뿐'으로 날마다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해서 365공안을 성취하고 크게 깨달아, 고통받는 중생을 구하기 바란다

 

********************

거짓된 지식과 학문을 버려라.

지식 만능은 물질 만능 못지않게 큰 병페다. 본질을 떠난 지식과 학문은 깨끗하고 순진한 본래의 마음을 더럽혀서 타락시키곤 한다. 인간의 본래 마음은 허공보다 깨끗하여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나, 그 진면목을 발휘하려면 거짓된 지식과 학문을 버려야한다.

아무리 좋은 보물도 깨끗한 거울 위에서는 장애가 되고, 거울에 먼지가 쌓일수록 마음의 눈은 더욱더 어두워진다.

우리 모두 마음의 눈을 가리는 거짓된 지식과 학문을 아낌없이 버리고, 허공 보가 깨끗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과 이광명을 뚜렷이 바로 보아야 한다.

난 참 멀리있구나 하지만 참 고루고루 하는구나

난 얼마나 많은 것에 본질을 알지도 못하고 떠들어 되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는 얼치기 구나 정말 이러다가 사람을 잡던지 나를 잡던지 하겠군 .....

인간의 뇌는 우주와 같고 난 우주에 먼지이다.

 

(禪)은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일이다.

(禪)은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일이다. '나는 무엇인가?'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물음이다.

 

인생은 빈손으로 와 빈손으로 가는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는 것은 일어나는 한 조각구름 같고,

죽는 것은 흩어지는 한 조각구름 같다.

떠 있는 구름은 본래 없는 것.

살고 죽고, 오며 가는 것도 그런 것.

그러나 늘 맑은 대로 머무르는 한 물건이 있다.

그것은 홀로 항상 청정하여 생사(生死)에 기대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항상 청정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한 물건인가?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깨닫는다면 생사에 걸림이 없이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어떻게 생사에 걸림 없는 자유를 깨달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목표가 분명하면 생활이 밝아진다. "왜, 선(禪)을 수행하는가?", "왜 날마다 먹는가?"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모두 놓아 버려라. 그 다음엔 우리의 견해나 조건, 상황을 모두 놓아 버리고 다만 행할 뿐이다.

 

거기에는 주인과 객, 안과 밖이 따로 없다. 안과 밖은 이미 하나가 되고 너와 나의 목표, 행동이 같게 된다. 이것은 위대한 보살의 길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 그러면 마음이 하늘처럼 깨끗해서 거울처럼 맑다. 붉은 것은 붉게, 흰 것은 희게 보인다.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준다. 모든 것이 이 맑은 거울에 비쳐서 보인다.

 

그러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하늘은 푸르고 나무는 파랗다.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다. 개는 '멍멍' 짖는다. 바로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그대로 진리이고 우리 또한 진리이다.

 

그러면 진리가 어떻게 바르게 작용하여 우리의 삶을 올바로 이끌어갈 것인가? 남이 배고플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부처님을 만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담뱃재를 어디에 털 것인가?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다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온전히 실천하면 우리의 평상심은 올바른 삶이 된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는 게 너무 많다. 그러나 그 안다고 하는 것은 삶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는데, 만약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인가? 아무리 특별한 경험이 있고 선(禪)에 대한 이해가 깊다 해도 순수하고 깨끗한 그 하나를 얻지 못한다면 특별한 경험과 선(禪)을 이해하는 것은 여러분의 수행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禪)수행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를 뿐'을 실천하는 것이다.

 

옛날 조주(趙州)선사가 남전선사에게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평상심이니라."

"그러면 그것을 계속 간직하려고 애써야 합니까?"

"애쓰면 그르친다."

"애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것과 상관이 없다. 안다고 하는 것(知)은 망상이고, 모른다고 하는 것은 무기(無記)이다. 의심 없이 도달하는 도는 허공과 같이 맑고 넓은데 어찌 옳다 그르다 시비를 가릴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들은 조주선사는 크게 깨달았다. 조주선사는 무엇을 깨달아 얻었나?

(禪)수행자들은 자주 '무엇을 지니려'한다. 하지만 그것이 큰 잘못이다. 앞서 말한 대로 안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아는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올바른 수행은 그 아는 것을 잘 소화하여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참다운 평상심이다.

 

그러면 왜 공안 365개를 만들었을까? 세상 사람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우리는 지식 치료제를 써야 한다. 조주(趙州)는 무엇을 얻었나? 입을 열어 말하면 벌써 실수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으면, 순수하고 깨끗한 답은 항상 앞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참 '나'가 진리를 올바르게 수용하고 중생을 구제할 것인가?

 

 

(道)는 위대한 어머니

비었어도 끊임없이

온 세상에 생명을 준다.

(道)는 항상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한다.

(道)는 어떻게 끝없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가? 이것도 같은 관점이며 같은 문제이다.

 

이 글에서는 불교적인 공안, 기독교적인 공안, 도교적인 공안, 선(禪)적인 공안이 실려 있다. 오래된 공안도 있고 새로운 공안도 있지만, 모두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 흥미로운 공안 이야기에 집착하거나 여러분의 견해에 매달린다면 그 공안의 참뜻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견해나 조건, 상황을 모두 놓아 버려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은 하늘같이 맑아져서, 어떤 공안에 대해서도 저절로 정답이 나온다. 그것이 지혜(예지)이다.

 

여러분이 공안을 받았을 때 설사 그 공안의 뜻을 알 수 없다해도 걱정하지 말라. 그 공안에 집착하지도 말고, 또 그 공안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말라. 오직 '모를 뿐'인 마음을 지키며 천 년, 만 년이 지나도록 쉬지 말고 정진하여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도(道)와 진리, 인생을 깨달아 매 찰나 찰나마다 올바른 상황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진리를 올바르게 수용하게 된다. 이것이 위대한 사랑, 위대한 자비, 위대한 보살의 길이다.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敎)밖의 것을 따로 전하니,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

본성을 바로 보아 부처가 된다. 만일 이 문에 들어서거든, 일체 생각을 내지 마라.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一切法)은 모든 마음(一切心)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만일 모든 마음이 없다면 모든 법이 무슨 소용인가?

 

아무 것도 만들지 않고 찰나 찰나 '오직 행할 뿐'으로 날마다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해서 365공안을 성취하고 크게 깨달아, 고통받는 중생을 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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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 (1981년 6월 28일, 정초우(鄭草宇) 총무원장 취임식)

 천지는 나와 같은 뿌리요 만물은 나와 같은 몸입니다.

천지 사이에 만물이 많이 있지만은 나 외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남을 도우는 것은 나를 도우는 것이며,

남을 해치는 것은 나를 해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해치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이치를 깊이 깨달아 나를 위하여 끝없이 남을 도웁시다.

 

바위 틈 돌호랑이 일어서서 소리치니

허공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말라버렸네.

크게 웃고 돌아서서 먼 곳을 바라보니

붉은 산호가지 마다 달빛이 찬란하다

 

계성이 본래 청정하다 (1981년 9월, 통도사 합동수계식)

 

계성(戒性)이 본래 청정하므로 계상(戒相)이 항상 무구(無垢)합니다.

청정무구한 이 무상정계(無上正戒)는 대천세계를 부수어 가루를 만들지언정 추호도 파괴하지 못하며, 무변허공(無邊虛空)을 붙잡아 단청을 그릴지언정 찰나도 전지(傳持)할 수 없습니다.

이는 개개(箇箇)가 원만하고 찰찰(刹刹)이 구족하여 연화대 위의 만덕존상(萬德尊像)이나 무간지옥의 극고중생(極苦衆生)이 호리고 차이가 없이 절대평등하여 담담적적(湛湛寂寂)하고, 휘휘황황(煇煇煌煌)하니 참으로 신묘불가사의합니다.

 

이는 사방 제불이 일시에 출현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설명하려 하여도 설명하지 못하여, 다만 대사대활(大死大活)하여 통개(洞開)하여 심안(心眼)이 확연철증(廓然徹證)할 뿐입니다.

 

홀연히 크게 웃고 바라보기 철수(鐵樹)에 홍화(紅花)가 찬란하고 방산에 맹화(猛火)가 염염(焰焰)합니다.

 

이에 부처와 조사는 삼천리 밖에 물러서고 곤충과 미물이 겁외(劫外)의 풍광(風光)을 구가(謳歌)합니다.

 

생사와 열반은 몽중작몽(夢中昨夢)이며 정찰(淨刹)과 예토(穢土)는 안리공화(眼裏空華)이니 오직 탕탕무애(蕩蕩無碍)한 일대활로(一大活路)에 우유자재(優遊自在)할 뿐입니다.

 

우리 모두 충천(沖天)의 예기(銳氣)가 충일(充溢)하여 있습니다.

 

각자(各自) 신명(身命)을 불고(不顧)하고 용맹정진하여 심안(心眼)을 활개하여 이 무상정계(無上正戒)를 친증(親證)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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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와 선악이 본래 공하고 (1986년 서의현 총무원장 취임식 법어)

 是非와 善惡이 本來 空하고 魔軍과 諸佛이 元是同體입니다.

生死涅槃은 꿈 속의 꿈이요 利害得失은 거품 위의 거품입니다.

眞如의 둥근 달이 휘황찬란하여 억천 만겁 변함없이 一切를 밝게 비취니

사바가 곧 정토입니다.

물거품인 이해득실을 斷然히 버리고

영원한 진여의 둥근 달을 항상 바라보며 나아갑시다.

만법이 청정하여 청정이란 이름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가없는 이 법계에 거룩한 부처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들판의 괭이소리 공장의 기계소리 함께 같이 태평가를 노래하니

푸른 언덕 잔디 위에 황금빛 꽃사슴이 즐겁게 뛰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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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1984년 부처님오신날 법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죽으므로 저것이 죽는다.

이는 두 막대기가 서로 버티고 섰다가 이쪽이 넘어지면 저쪽이 넘어지는 것과 같다.

 

일체 만물은 서로서로 의지하여 살고 있어서, 하나도 서로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이 깊은 진리는 부처님께서 크게 외치는 연기(緣起)의 법칙이니 만물은 원래부터 한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쪽을 해치면 저쪽은 따라서 손해를 보고, 저쪽을 도우면 이쪽도 따라서 이익을 받습니다.

 

남을 해치면 내가 죽고, 남을 도우면 내가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우주의 근본진리를 알면 해치려고 해도 해칠 수가 없습니다.

이 진리를 모르고 자기만 살겠다고 남을 해치며 날뛰는 무리들이여!

참으로 내가 살고 싶거든 남을 도웁시다. 내가 사는 길은 오직 남을 돕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상반된 처지에 있더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침해와 투쟁을 버리고 서로 도와야 합니다. 물과 불은 상극된 물체이지만, 물과 불을 함께 조화롭게 이용하는 데서 우리 생활의 기반이 서게 됩니다.

 

동생동사(同生同死), 동고동락(同苦同樂)의 대 진리를 하루 빨리 깨달아서 모두가 침해의 무기를 버리고, 우리의 모든 힘을 상호협조에 경주하여 서로 손을 맞잡고 서로 두우며 힘차게 전진하되 나를 가장 해치는 상대를 제일 먼저 도웁시다. 그러면 평화와 자유로 장엄한 이 낙원에 영원한 행복의 물결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화창한 봄 날 푸른 잔디에

황금빛 꽃사슴 낮잠을 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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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 물은 물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지금 이대로가 극락 세계]

 

   극락세계는 서방에 있다고들 한다. 이를 두고 육조스님은 동방세계 사람들이 염불하여 다 서방세계로 간다면 서방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느냐고 하셨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모든 것이 본래 광명 속에 살고 있고 우리 자체가 본래 광명이다. 모든 존재, 모든 상태가 부처인줄 알아서 부처님으로 존경하고 봉양한다면 극락세계에 따로 갈 필요가 없다. 지금 이대로가 극락세계다.

 

 

 [화두] 

  마음 닦는 공부중에서도 참선이 제일의 첩경이다. 화두를 열심히 하다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도 화두가 간단없이 계속되고, 나아가 꿈속에서도 계속되는 경지에 이른다. 여기에서 더욱 노력하여 물러서지 않으면 깊은 잠이 들어도 화두가 역력히 계속되는 숙면일여(熟眠一如)에 이른다. 이는 잡념이 완전히 끊기고 무심(無心)의 상태가 된 증거다.

이러한 숙면일여의 무심에서 확연히 깨우치게 되면 그때 비로소 마음의 눈을 크게 떠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소리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자유자재한 대해탈인이다.

 

["이 뭐꼬"]

   마음을 닦는 것이 불교다. 화두참선은 마음을 닦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 뭐꼬'는 화두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다. '이 뭐꼬'란 질문을 계속해서 하다 보면 깨치게 되고 마음의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법문을 들을 때나 책을 볼 때나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이렇게 물어 보라.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은 무엇인가?"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읍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읍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읍니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가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가 자기 속에 있읍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읍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끝이 없읍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끝을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읍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읍니다. 나만을 위한 생각을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려 자기를 상실하고 있읍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읍니다. 바다를 보고 거품을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읍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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