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되는♡길

자린고비는 어떻게 돈을 다 썼을까?

탤런트 2007. 2. 2. 17:15
자린고비는 어떻게 돈을 다 썼을까?
 

 

예로부터 토착지주나 부자들의 이재술(理財術)에서는 인색이 따른다.

 

충청도 거부 조륵*은 장독에 빠진 날파리를 십리나 쫓아가 잡고는 몸에 묻은 간장을 쪽 빨아먹고 왔으며, 일제 강점기 경남 진주땅 거부 김기태의 할머니는 콩나물 장사를 하며 돈을 모았는데 밥이 아까워 콩나물 죽을 먹되, 반찬값을 아끼기 위해 간장 하나만 놓고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은 돈이 당대 6천석이었다.

 

인색가들의 행태를 보면 추석치레로 마련한 고무신을 좀체 신지 않다가 명절이나 특별한 출입이 있을 때만 신고 한번 신기만 하면 기어코 우물가에서 씻고 닦고 했는데 신어서 닳기보다는 닦아서 닳는 것이 더했다.

 

또한 담뱃대에 담배를 재고 입에 댈 뿐 피지 않으니 담배값 들지 않고, 제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부채를 펴고 있을망정 부채를 흔들지 않고 얼굴을 흔든다.

 

이런 실리주의는 ‘노래기도 회쳐먹을 놈’이라고 동네 웃음거리가 될지언정 남들과 말썽을 빚지는 않는다.

 

대개 ‘자린고비’라면 돈 모을 줄만 알고 쓸 줄 모르는 천하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사람의 대명사다. 실제로 충주 지방에 살았던 만석지기 조륵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국에 퍼져 '자린고비 이야기'로 구전되는데 그가 모았던 많던 재산을 흩어버린 내력은 자못 흥미진진하다.

 

먼저 자리고비가 돈을 모은 내력을 살펴보자.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 한 뙈기 없이 거시기 두 쪽만 차고 사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제한적이었다.

 

하루는 ‘화복(禍福)은 자기에게서 나오느니 구하려는 자가 힘쓰면 얻어지는 법. 싸라기 한 톨이라도 천금 같이 아끼기로 가법(家法)을 삼아 만석을 채운 후에 재물을 쓰리라’고 다짐하였다.

 

빌어먹다시피 하며 남의 집으로 떠돌아다니며 머슴도 살고 삯짐도 지고 할 무렵 우연히 횡재를 하였다. 수족이 닳아지도록 부지런히 치산(治産)을 하는데, 인가가 없는 길가에서 계란 하나를 주었다. 아는 집에 맡겨 놨더니 암병아리요, 낳는 족족 암놈이어서 조륵의 재산은 기하급수로 불어났다.

 

그로부터 무슨 일이고 손만 대면 수지가 맞아 만석 규모의 재산을 모을 때까지 재물이 들어올 싹수라, 단 하나도 나가는 조짐이라곤 보질 못했다. 그래서 자기는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신념으로까지 굳어지게 되었다.

 

“너도 분하거든 복을 타고 나거라!”
이게 그의 처세 철학이다.

 

그러던 것이 수십 년 오르막의 끝이었나. 한밤중에 족제비가 닭 한 마리를 물어갔다. 조륵은 이것은 장차 재산이 나가려는 징조라. ‘재물이 나갈 때는 거기 처하는 길이 따로 있는 법이니 이제부터 본때 있게 써야 한다’며 그 방법을 궁리를 했다.

 

아무날 동네 사람들을 위해 돼지를 잡고 닭을 삶아 잔치를 걸떡지게 벌여놓고 그 동안 굽어지고 꼬였던 세간의 오해와 미안함을 풀었다. 그리고는 석수를 불러 다리를 놓고 둑을 쌓아 땅을 개간하고 굶주린 민인들을 위해 농지를 무상으로 분배해주었다.

 

이러구러 그가 일생 모은 재산을 뜻있는 일에 보람 있게 다 써버리고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만석꾼의 자식이건만 유산다운 유산 하나 못 받은 아들에게 이때 이른 말이

 

“네 복은 네가 타서 살려므나.”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취재(取財)은 잘 하지만 활재(活財)의 명수는 보기 힘들다. 제 벌어 제 다 쓰고 가는 이름 없는 부자들이 태반이요, 대물림하기 위해 수많은 재산을 남기지만 불과 10년도 넘기지 못하고 후대에 와서 패가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허나 재산을 후대에 남기지 않고 민인을 위해 모두 활재한 경우는 분명 면면히 이어져온 부자의 내력이다. 먼저 세속의 이인(異人)이라 불리는 의주 만상(灣商) 임상옥(1779~1855)이 있으며, 해방 직후 경주 만석지기 최준(1884~1970)이 스스로 토지를 개혁하고 재산의 대부분을 대학에 기부한 것, 기업인으로서 부산바닥에서 거지들의 재활을 도와 일명 거지대장으로 불린 김지태(1908~1982, 한국생사, 삼화그룹 회장 역임) 등 모두 한국 의부(義富)의 계보인 것이다.

 

요사이 세태를 보면 취재와 대물림의 명수보다 활재의 명수인 자린고비 조륵이 돋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 조륵 : 1649~1714. 한양 조씨, 조선조 인조 때 참봉 조유증의 넷째 아들로 충북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말년에 영호남 지방에 흉년이 들자 곳간에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 이에 영조가  벼슬을 내렸다. 민인들이 그의 공을 기려 선덕비를 세웠는데 그 비명이 자인고비(慈仁考碑 : 어질고 자애스러움을 기리는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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